[LJM 칼럼]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일
살다 보면 수많은 실수를 하기도 한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무릎을 꿇는 다고 할지라도, 항상 완전한 결정을 내리지는 못할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 머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실수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우리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놀랍게 이루어 질것이다.
롬 8:28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라고 밖에는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실패와 거절, 가난과 아픔...현재는 말이 되지 않은것 처럼 보이고, 그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현재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렇게 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성령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다 된 밥에 재뿌리기"... 민수기 13-14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이 속담의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것 같다.
출애굽의 과정을 거치며, 홍해를 지나서 수 일내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갈수 있는 장소에 와 있었고, 하나님께서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항상 감싸 안으시는 축복과 임재가 있었기에, 몇 발자욱만 더 가면 Mission complete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입술이었다. 그 마음에 있는것들이 입술로 나오겠지만, 일이 꼬여서 엉망이 될지라도 이 보다 더 극적으로 엉망이 될수는 없는것이다. 가나안에 도착 하기까지 몇일이면 충분한 시간이 40년의 시간이 지체되고, 지연되었던것이었다. 12명의 정탐꾼. 각 지파를 대표하는 한명, 모두 12명의 지휘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좋은지 나쁜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정탐 후 그 땅 실과를 가져 오는것이 임무였다.
12명의 정탐꾼의 임무 수행 후, 그들의 보고가 회중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들 대다수의 눈에는 상황이 절망적이었나 보다. 장대한 아낙 자손과 여러 족속을 보면서 그들은 좌절하고 있었다. 상황 때문에 하나님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언제부터 하나님앞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었던가? 갈렙과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한 보고 보다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가 더 백성들의 마음을 Touch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이미 모든것을 알고 앞서나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신실하신 인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면서, 육신의 안목으로만 모든것을 판단했던것이다.
부정적인 태도의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면 상당한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시는 모든 일들이 한순간에 다 가려져 버리고, 악평과 원망이 난무하게 된다. 귀한 믿음의 동역자가 그 만큼 중요하다.
그들의 부정적인 보고의 결과는 원망이었다. 강팍이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민14:1)" 거기서 더 나아가서 원망은 불신을 낳고, 여호와를 업신여기에 되고, 그 순간 짧은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과 분별이 미련한 계획과 행동으로 연결되어 버린다.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14:4)" "온 회중이 그들로 돌로 치려 하는데 그때에...(민14:10)"
그 순간의 실수와 불순종이 여호와로 하여금 진노하게 하셨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려 질것이요(민14:28-32)""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며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더라(민14:34)"
부정적인 보고에 대한 육신의 반응은 원망과 불평이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멸시였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반응은 진노가운데 40년 간의 광야 생활이었다. 축복의 시간이 지연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훈련과 연단이 늘어 나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단 며칠이면 들어갈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한순간에 진멸되는것을 모세의 중보기도로 막았다는 사실이다.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함께 중보할수 있다는것은 큰 축복이다. 하나님만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기도할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모세는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매달리면서 자비와 긍휼하심을 계속 구하였다. 생명을 걸고 드리는 중보기도였다. 그 열매는 너무나 컸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14:20)" 한 명의 진정한 중보기도자로 인해서 오는 결과와 열매는 상상을 초월할 때가 많다.
또한, 육신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반응했던 두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를 하나님은 절대로 버려 두지 않으셨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히리라(민14:24)"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Generation to Generation을 잇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갈렙은 여호수아 14장의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의 주인공으로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 산지, 헤브론에서 다윗의 왕조가 태동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 여호와를 감동하게 한다.
한 순간의 불평의 말이, 어리석게 육적인 사람들과 원망을 말을 섞을때, 때로는 다 된밥에 재를 뿌리게도 한다.
오랜동안의 훈련과 연단이 잘못하면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두고 이 원망의 말 한마디에 지연되거나 수포가 될수 있다. 하나님앞에서는 다수결이 중요한게 아니다. 확률 또한 중요한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칙만이 역사할뿐이다.
그 과정이 쉬운일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또한, 그 길을 혼자 걸을수 있는것도 아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그리고 모세와 아론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의 눈을 함께 나눌수 있는 동역자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고난과 환란가운데, 그 당시에는 별것아닌것 처럼 보여도, 훗날 다가오는 믿음의 결과와 순종의 축복은 감히 상상할수 없을것이다.
"이 산지를 내게 지금 주소서"의 주역이 되고 싶다. 오늘 믿음의 순종의 결과로 수많은 영혼들을 일깨우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싶다. 그냥 만들어 지지는 않을것이다. 순간 순간이 인간적으로 보면 원망적인 상황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민수기 13-14장의 전철을 다시 밟는것을 원치 않으셔서 이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신다. 지금도 이러한 아픈 환경속에 있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의 태도와 입술을 저울질 하고 계실것이다.
입술의 분복을 누리고 싶다. 감사할때 감사한 일이 생길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할때 소원이 이루어 질것이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어쩌면 지금쯤, 고난과 환란의 분량이 다 끝나가는시점인지 모른다. 며칠이면 약속하신 일들이 응답될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마음이 강팍하게 되어서 원망과 불평의 입술로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를 할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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