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간에 부르짖는것과 형통의 시간에 기도 하는것 중에 어느것이 더 쉬울까? 고통의 회오리 바람이 강하게 몰아칠때는 "하나님, 제 문제로만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이젠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 하게 하소서"라는 고백을 종종 한다. 스스로의 개인 문제만에 얽매이다 보니깐 늘 지엽적인 기도밖에 못하는 부끄러움의 고백일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이렇게 기도하면 혹시나 고난을 속히 벗어날수 있을까 하는 속마음도 숨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신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더 변하는 우리 마음. 다른 어떤 일 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가 어찌나 힘이 든지. 조금 문제가 해결된다 싶으면 무릎 기도가 아니라 내 마음과 몸에 좋을 일을 우선시 해 버리고, 식사 기도나 예배 중에 드리는 기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풀려 가던 문제가 다시 얽히기 시작하면, 나의 변덕과 안일함에 안주하던 부끄러움은 생각지도 못하고, 또 고통? 다시 고난? 불평부터 하기 일수다. 내 모습이다. 그렇기에 훈련이 필요하고, 그 영적 연단이 내 속 깊은 곳에 Body memory가 되어서 영적인 안전장치가 되고,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유다왕 웃시야 왕은 16세의 나이에 부친 아마샤를 대신해서 왕이 되었다. 왕궁 속에서 평안함과 왕자로서의 대우속에서 곱게 잘 자랐을것 같지만, 그 가운데 50여년을 유다 땅을 통치하면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특별한 고난의 시간이 없었음에도 마음이 늘 한결같이 하나님을 바라 볼수 있는 웃시야에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육신의 깊은 고난은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 열려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스가랴를 항상 가까이 두었고, 하나님의 묵시를 듣고 들으면서 웃시야는 하나님을 구하고 또 구했다. 평안의 사람 웃시야였지만, 그의 마음을 굳게 지탱하게 해 줄수 있는 사람, 왕 앞이지만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던 스가랴가 옆에 있었기에 웃시야는 젊은 시간에 늘 하나님을 바라 볼수 있었다.
큰 축복이다. 옆에서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함께 나갈수 있는 동역자, 사역자가 있다는것은 인생의 귀한 만남중의 큰 만남이며, 큰 축복이다. 그렇다. 스가랴의 사는 날 동안 웃시야는 하나님을 구하였고, 그런 모습의 웃시야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복으로 화답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만 옆에 두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집중하던 웃시야였다. 그리고, 그 말씀에 온 마음을 드렸던 유다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웃시야왕을 도우사 전쟁하는 곳마다 승리를 주셨고,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 마온사람들을 치게 하셨고, 암몬 사람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셨다. 그 뿐 아니라 웃시야의 명성을 더 높이셨으며 애굽 변방까지 그 이름을 더 높이셨다. 수 많은 물 웅덩이, 망대를 세우고, 거친땅을 기경하고, 육축이 넘쳐 났으며, 농산물이 넘쳐 났다. 싸울수 있는 군사의 수 또한 엄청났으며, 방패와 창, 투구를 비롯하여 무기도 넘쳐 났다.
"...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대하 26:15)
그가 하나님을 구하였을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고, 그의 나라 유다를 강건하게 하셨다.
믿음에는 갈등이 항상 동행하듯이, 형통과 축복에는 교만이라는 무시 무시한 대적이 늘 함께 숨어 있는것일까?
교만은 악을 잉태하고, 그 악은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높여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물어 봐야 할것도 이제는 내 마음 대로 한다. 별 문제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하고 싶은걸 다 해도 지금 당장은 어떤 영향이 당장 오지 않을수 있다. 형통의 시간을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높은 정상에 서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이 우스워 진다. 자신의 어려웠던 시간은 생각지 않고, 왜 저렇게 사는걸까? 비웃음과 하찮은 동정이 마음속 깊이 자라난다. 많은 부분이 돈으로 해결된다. 문제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주변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돈과 명예, 축복의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잃어간다. 여호와의 얼굴을 잊어 버리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형통했던가?" 다시 그 형통함이 나의 영적 미련함으로 한 순간에 과거형이 되어 버릴때가 많다.
웃시야도 그랬다. 자신이 어느 순간 부터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을 우습게 알고,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면서 자기 스스로 여호와의 전에 분향하려했다. 오직 아론의 자손 제사장만이 할수 있는 직분을 웃시야는 스스로 업신여겼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점점 사라져 버렸다.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해졌다. 몰랐다. 스스로도 자신이 그렇게 까지 되어 버렸는지 몰랐을 정도다.
제사장이 왕을 막으려고 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기어이 자기가 하고 싶은 분향을 하려고 했다. 만일 그때 제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치시길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늘 기회를 주길 원하시고, 기다리신다.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시고, 가르치시고, 훈계하신다.
아무리 유다 나라의 큰 영광과 명예를 얻었다고 한들,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인것 같다. 사방 지경이 자신의 손안에 들어 와 있는것 처럼 보였지만, 교만의 범죄로, 결국 본인은 죽을때까지 별궁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여호와에 전에도 못 들어갈 뿐 아니라 왕의 자리도 내 놓아야만 했다.
때로는 "난 하나님만 바라보면 그만이지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없어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만 들으면 되거든요. 말씀도 특별히 볼 필요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만 들으면 돼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맞는 말인것 같지만, 상당히 위험한 말일수 있다. 자기 스스로만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다는 착각속에서 말씀까지도 무시하면서 많은 오류를 범할수 있다.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세심하게 말씀 하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람과 교제를 통해서도, 환경을 통해서도, 여러가지 channel을 통해서도 함께 말씀하신다. 같은 성령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반드시 일치할것이다. 높은 영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웃시야는 말년에 하나님의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말씀 듣는 법을 잊어 버렸고, 하나님을 구하는것도, 선지자와 제사장의 말을 듣는것 또한 다 잊어 버렸다.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것 처럼 스스로 착각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독선의 연속이다. 그래서 자신도 하나님앞에 분향할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게 되었다. 율법을 마음에서 지워져 버렸기때문이다.
고난의 기도는 말씀이 마음속 깊이 새겨지게 할것이다. 이 시간은 끊임 없는 기도 속에서 주님 보좌앞으로 함께 나아갈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수 있는 시간인것 같다.하나님의 열심은 수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인생의 맨 마지막까지 변질되지 않고, 변덕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시려고 하실것이다. 하루에 수 십번씩 마음속에 깊은 갈등이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훈련 시키셨음을 알게 될것이다.
그 시간까지 하나님앞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지킬수 있을까? 인생의 맨 마지막이 가장 궁금하다. 어떤 모습일까? 지금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열심히 구하지만은, 그 시간이 되었을때 나도 모르게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있지는 않을까? 스스로 자랐는것 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며, 세상의 모든 경륜을 다 아는것 처럼 휘젓고 다니지는 않을런지...두렵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
오늘 수많은 은혜가 넘친다고 할지라도, 평안의 시간에, 인생의 마지막의 시간에 진정한 은혜가 필요한것 같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성해졌지만, 마지막 날의 은혜를 놓쳐 버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결단과 결심이 필요하다. 사방의 어려움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나를 지켜 주기에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오늘의 형통함이 마지막 부르시는 순간까지 계속 될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대하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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