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Weekly칼럼(1-50)

억울하고 원통할때 (16)

Joseph Lee 목사 2013. 10. 31. 04:18

[LJM 칼럼] 억울하고 원통할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격의 부족때문에 때로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 줄때가 많다. 말과 행동을 특별히 조심 또 조심하려고 하지만, 어느 한순간 나도 모르게 뜻하지 않은 말과 행동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 줄때가 많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때도 종종 있지만, 마음이 터져 버릴것만 같은 순간도 종종 있다. 아무리 새벽과 밤을 부르짖어도 응답이 더디거나 없을때, 예상과 다른 반대의 상황이 진행될 때는 마음을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좌절과 낙심에 빠져 버린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연약함때문에 가끔 로뎀 나무 아래에 머무를때가 많다. "이제 족하오니... 내 마음이 주께 특심하였사오니...내 생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그런  넘어짐 때문에 더 겸손해 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것 같다. 어느 시간에 말씀의 은혜가 충만하면 그 순간은 세상의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절대로 넘어 질것 같지 않은데, 하루를 못 넘기는게 나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연약함이다.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힘이 드는데 자꾸만 오해가 생기고,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까지 벌어진다. 가만히 있어도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든 환경인데, 하나님은 훈련중에는 절대로 편안하게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 않는것 같다. 오랜 기도로 응답을 받아서 움직이는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자꾸만 생긴다. 그렇게 기도했고, 기도의 Confirm도 환경 가운데 받았는데, 이런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혼자 고민할때가 많다. 그런 시간에는 갑자기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도 사라지고, 혹시나 하나님께 잘못된 믿음으로 나아가는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욥도 그랬고, 다윗도 그런 인생을 살았다. 바울은 피묻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셀수도없이 억울하고 원통한 순간을 보냈고,  모세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인도해 나갈때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많은 이들이 형통한 사람들의 이름을 선망한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그런 축복속에 살고 싶어 하고, 솔로몬 왕의 부귀영화를 영적인 축복과 더불어 누리고 싶어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해도 축복의 약속이나 구원의 말씀에 대해서는 늘 간절하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닐것이다. 그런 선망의 이름 가운데 이삭이 들어 있다. 육적인 환란이 없었던 사람같아서,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영육간의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인생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수 있다. 과연 이삭은 마냥 형통했던 사람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삭 또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 가운데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가운데 큰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이복 형 이스마엘의 시기와 질투속에서 고통받았고, 자기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어머니, 사라의 죽음을 어린 시간에 지켜 보아야만 했다. 40세가 되기 까지 홀로의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은 이삭과 깊은 교제를 하길 원하셨다. 그에게 기다림이란 늘 함께 있으면서도 어려운 존재였다. 40세에 아내 리브가를 얻고 나서도, 아들들, 에서와 야곱을 얻기까지 또 다른 20년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이삭에게 기한도 없이 기다리게 하셨다. 하지만, 이 시간을 이삭은 참 잘 이겨냈다. 끝까지 기도했다. 이 믿음의 승리로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중 믿음의 자녀의 표상이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지만, 이삭은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는 인생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까지 과연 얼마나 오래 기다릴수 있을까? 조금 기다리고 나서 비명과 원망 부터 흘러 나오는게 바로 나의 모습이다. 창26장. 이삭이 거부가 되고 나서도, 100배의 농사결실을 맺고 나서도 이삭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 왔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 났던것이다. 강수량이 극히 적은 가나안 네게브 지방에 거할때, 이삭의 우물을 함께 거주하던 블레셋 사람들과 그랄 목자들이 와서 한번도 아닌 세번씩이나 억지로 빼앗았던것이다. 물이 그만큼 귀했을 뿐더러 아버지 아브라함때 팠던 우물이라서 이삭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을텐데, 이삭은 그냥 모든것을 버리고 떠나버린다. 이미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해서 그들을 대적할 힘이 충분했지만, 이삭은 칼과 무력으로 대응하기를 기뻐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원통함이 가득할수 있었을텐데...

 

오랜 기다림의 훈련을 통해서 이삭은 온유와 겸손이 몸에 깊게 베인 사람이었다. 털을 깎이는 어린양처럼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삭을 통해서 성령께서는 예표하고 계신다.

이삭이 원통함을 방어하는 최고의 수단은 온유함이었다. 직접 상대하지 않고 원수갚는것까지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겸손의 모습의 이삭은 하나님의 시간까지 피해다니고, 옮겨 다니길 즐겨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예비한 고난의 십자가의 잔을 받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이삭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하나님의 사람을 신원하길 기뻐하신다. 그 전에 우리의 자아가 기다림이란 훈련을 통해서 부서지고,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만들고 싶어셔서 기다리실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의 영광이 함께 하는것 처럼, 이삭 또한 창26장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신원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이삭을 쫓아냈던 블레셋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이 친히 먼 길을 찾아 와서 화친 조약을 먼저 청하고, 원통함 대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 했던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또 다른 우물을 손에 쥐어 주신다. 또한, 이삭은 여호와께서 그 원통한 일을 통해서 영육간의 지경을 훨씬 더 넓혀 주셨던 것을 삶으로 깊이 체험하게 된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의 영광이 있을수 있는것이다.

 

온유한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 이삭의 모습을 통해서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 지는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실제적인 삶의 영육간의 응답이다.

그 온유함의 지혜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겠지만, 하나님을 깊이 알아나가면서 얻게된 보물이었으리라.

이삭에게는 억울하고, 원통할때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중의 하나인 온유함과 겸손함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온유함은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창 24: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마 5:5 ,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

             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 임이요

시 118: 5) 내가 고통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