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Weekly칼럼(151-174)

광야는 정복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155)

Joseph Lee 목사 2013. 11. 3. 13:42

광야는 정복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155)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신1:6-8)

<josephlee0212@gmail.com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축복받을 만한 그릇이 먼저 만들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때가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약속이 크면 클수록 더 오랜 시간을 기도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축복에 취해서 넘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다듬어시는 것입니다. 축복을 허락하시기 전에 우리의 내면에서 먼저 일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Test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약속을 지키시려고 열심히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야곱의 자손들을 애굽으로 불러 들이셨습니다. 고센 땅에 머물면서 큰 민족이 될수 있는 모든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하시는지 제대로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원하시는 바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때가 되면 애굽을 벗어 날것이라고만 하셨지만, 야곱의 후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땅에서 번성하고, 번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배후에서 하나님의 열심이 환경과 약속의 모든 조건을 이루어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그리고 민족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깊이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제사가 무엇인지 모르는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막연한 약속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430년동안 이방 나라에서 나그네의 객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응답되고 있었습니다. 고센땅에서 애굽 사람들과 구별 될수 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깊이 동화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과 허용없이 이루어 질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번성 할뿐이었습니다. 애굽을 다스렸던 이방 힉소스 왕조가 본토인인 18왕조에 의해서 물러 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제와 고통을 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 일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도록 하셔야 했습니다. 둘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와의 선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지만, 출애굽하는 것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출애굽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순간적으로 역사하시면, 출애굽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지만, 출애굽 후의 광야에서의 백성들의 마음이 온전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하나님의 강한 열심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와 선택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아니기에...그 자유의지가 온전하게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화학적인 반응과 순종이 필요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출애굽을 갈망합니다. 환경이 변하면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 질 것같습니다.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서 Dynamic한 역사들이 일어날 것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적과 이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일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이 변할 것 같았으면,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일해 나가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내면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변화를 가지게 됩니다. 많은 시간을 통해서 생각하고, 갈등하면서, 일어났다가 넘어졌다가 하면서 생각의 변화를 가져 옵니다. 물론 다메섹에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극적인 변화를 체험하면서 삶이 온전하게 변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사울은 이전에도 하나님께 자기 열심으로 미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초점이 자기 열심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변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손을 경험하기를 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출애굽 후의 광야 생활과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하나님을 알아 갑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동안 오래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의지입니다.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심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회개의 역사를 가져 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보시고, 구원과 영생을 허락하십니다. 일생에 한번 있는 영적인 큰 변화이며, Turning Point입니다. 인생에서 단 한번 일어날 수 있는 일회성의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시간을 반드시 보내게 됩니다.

회심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조금의 관심도 없다고 하면, 진정으로 구원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거룩하심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며,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Vision이라고 합니다. 많은 경우 Doing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거룩하게 닮아 가는 과정은 Being에 해당하며, 성화에 해당합니다. 성화의 doing과 being에는 각자의 하나님의 구원과 칭의와 달리, 개인의 능동적인 태도가 요구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가 이 땅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광야의 과정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 광야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이끄심을 받는 성화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루어야 할 Doing과 Being에 대해서 이 시간동안 철저하게 훈련시키시고 교육시키셨습니다.

 

영적인 광야에서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속성 과정은 없습니다. 거칠 것은 다 거치게 하십니다.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 정. 의. 모든 요소를 하나님께서는 강하게 Touch하실 것입니다. 출애굽한지 몇개월 되지 않은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의 율법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Guidance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하나도 제대로 지켜 질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낙심과 낙담이었습니다. 그 어떠한 사람의 열심으로도 하나님께 도저히 도달 할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으셨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늘 반대로 행했습니다. 자신들이 할수 있다고 생각할때마다 처절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낙담해서 한발자욱도 나아갈수 없다고 했을때,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배웠던 가장 최우선의 원칙은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혹독한 노예 생활을 했지만, 시간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공급되었습니다. 잠을 자며 지낼수 있는 숙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처음부터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차례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그 과정마다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광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추위와 더위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 하셨지만, 물이 필요해서... 여호와를 찾을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을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호소 할때까지 하나님은 잠잠히 계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야만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시지만, 사랑하는 자녀가 부르짖을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구하지 않을때는 더 절박한 상황을 만드셨습니다. 자족해서 감사한 것과 이런 것까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가 하면서 구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구하지 않는 것의 생각의 이면에는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수 있거나, 자신이 이룰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만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공급되며,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이 모든 것을 허락하셔야만 모든 인생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깊은 사람은 하나 부터 열까지 다 구합니다. 그러나, 자유롭습니다.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것까지 아뢰는가 싶을 정도로 기도를 하지만, 삶의 깊이와 내면의 성숙도가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은 더 깊이 의뢰하는 자일 수록 더 넓은 영육간의 지경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큰 걸음을 걷도록 하실 것입니다. 성화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더 넓은 Vision의 지경이 펼쳐 지게 될 것입니다.

 

의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바라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았지만, 마음 중심에는 애굽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삶이 혹독했지만,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주체가 애굽이라고 믿었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 앞에서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과 애굽의 거짓 신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자꾸 뒤돌아 보고 싶어 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면서, 그들의 생각 중심에 있는 의지할 만한 요소들을 제거 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생각한 많은 계획들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할때, 모든 문이 열린 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외에 바라 보는 모든 것을 가로 막으십니다. 하나님만을 찾도록 하십니다. 그냥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차지 하고 싶으셔서 하나님의 열심은 맹렬하게 일하십니다.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았지만....영원히 이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광야 학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과실과 열매를 먹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의 메추라기와 만나는 멈춰지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과실과 열매를 다양하게 먹을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루 하루 필요한 양식만으로 생활했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곳간에 가나안 땅에서 재배된 과실과 곡물로 가득 채워 놓도록 하셨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지금 힘들게 하는 모든 환경와 여건은 모두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하나님께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이 모든 것은 이루어집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문제입니다.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뼈속 깊이 여호와의 말씀이 깊이 새겨 지지 않으면, 다시 우리 생각과 주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살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우리의 방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응답하실까?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쯤 깊이 변화가 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잘 다스리고 정복할수 있을지 시간을 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까지입니다.

 

낙심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수많은 낙심과 넘어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어떠한 일에도 자신 할 수없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렇습니다. 속단과 단정 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압니다. 아무리 철저한 계획과 노력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Nothing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낙심을 많이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늘 두렵고 떨립니다. 스스로를 낮추게 됩니다.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께 여쭈어 봅니다. 하나님께 동행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아무리 멋진 계획과 지혜라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깨닫습니다. 좌절과 낙심을 많이 한 사람은 무릎 꿇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게을러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수 있는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기에 절대자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수많은 좌절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겸손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도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의 모든 세대중 가장 온전하고, 순종했던 세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광야 생활을 통해서 사람의 힘으로 할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좌절과 낙심이 그들을 무릎 꿇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한발자욱 움직일때 마다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지시하는 대로만 했습니다. 지난 40년동안의 광야 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큰 기적과 승리로 짧은 시간에 가나안 일곱 족속을 정복했습니다. 순종할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더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여리고가 무너 지면서...모든 족속을 차례로 정복했습니다. 짧은 시간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백성들은 40년동안 좌절했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12지파가 순서대로 땅을 차지 했지만,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정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허락하십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정복해야 할 하나님의 Vision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좌절과 낙심입니다. 겸손으로 채워 질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중에서 계속 넘어짐을 반복한다면...겸손으로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꼭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