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148)
연단후에는...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훈련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성경에서 절대로 빼놓을수 없는 사람이 욥과 다윗일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지만, 연단 후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만지시고, 다듬으셨는지 발견할수 있습니다. 죄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이름때문에 애매하게 고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고통의 길을 걷게 하시는 시간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고난의 시간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의 깊은 손길로 만지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엄한 책망과 채찍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똑같은 길을 걷는 죄인의 모습이기에 누가 누구를 함부로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곧이 변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변론도, 변호도 필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중보 기도만이 우리의 몫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길을 걸으셨습니다. 또한,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했었던 요셉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진노하실때마다 생명책에 적혀 있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중보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키워 나가십니다. 그 영혼의 연단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무릎입니다. 눈물입니다. 생명건 중보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 기도의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은 반드시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이시기에 반드시 지키십니다.
고난 받는 욥에게 세 친구들이 왔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세친구입니다. 이 친구들은 당대에 상당한 지식층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해박한 지식과 깊은 경륜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이 처한 고난의 상황을 보면서 처음에는 아무말도 제대로 할수 없었던 친구들이 시간이 가면서 각기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위로와 격려가 아닌 욥에 대한 책망과 지적이었습니다. 조소와 조롱이었습니다. 욥이 범죄했기에 그러한 마땅한 벌을 받고 있다고 마음을 찢어 놓았습니다. 세친구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논리를 펴서 욥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변론한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욥의 영혼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 또한 모두 자신의 분야와 자신이 아는 범위내에서 변론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세 친구들과 욥의 대화는 3번에 나뉘어서 심각한 논쟁과 변론이 이어집니다. 시간이 가면서 욥을 위로하려던 목적은 사라지고, 욥을 정죄하는데 모든 것을 집중하게 됩니다.
엘리바스. 그 중에 가장 말을 많이 한 사람은 엘리바스입니다. 그는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처음 대화에서는 욥의 고통을 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관찰과 경험은 상당히 깊은 수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고통 받는 악인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풀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욥은 불의하다는 데 초점 맞춥니다. 욥은 그 가운데 자신은 그렇게 불의 하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던 엘리바스는 욥의 항변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두번째 변론부터는 욥에 대해서 심각하게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세 친구 중에서 엘리바스의 모습을 우리가 가장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진정으로 힘들어 하는 영혼을 어느 순간까지는 위로하지만...그 범위를 넘어 설때는 비난과 책망으로 가시 역할을 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랑의 형상은 있지만,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없는...엘리바스가 오늘 우리의 모습일수 있습니다.
빌닷. 또 한명의 친구 빌닷은 법률가였습니다. 역사에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논쟁하는 것을 상당히 즐겼습니다. 모든 것이 흑백 논리 였습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했습니다. 빌닷에게 하나님은 오직 심판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욥을 자신이 가진 논리 대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는 욥에게 죄인이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악인은 반드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분노를 보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닷에게 하나님은 몽둥이를 들고,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고 있는지 감시하고 관찰하는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이런 신앙은 율법적인 모습으로 반드시 연결 됩니다. 숨이 막히게 됩니다. 빌닷은 욥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위로 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께 처음 받았던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할때마다 여호와께 엎드렸습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빌닷의 모습 속에서는 자비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오직 법만이 있을뿐이었습니다. 이 율법이 욥만 고통스럽게 한게 아니라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못 박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의 저주를 다 짊어지시고, 죽음으로 대가를 지불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다른 영혼들을 율법으로 죽이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흑백논리로, 율법주의로...위로와 격려보다는 자신이 아는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죄하는데 익숙할 수 있습니다.변론이 깊어 지면 질수록 빌닷의 대화는 적어집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대화로 들어갈수록...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빌닷의 말수는 줄어듭니다. 율법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정죄와 조소만 있을뿐 해결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욥을 정죄했지만, 정작 인생의 깊이를 법으로 다 해석할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한계를 드러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공식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을 넘어서는 이해 안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자신 만만했던 빌닷의 대화도 점점 발언권이 약해 지는 것 또한 율법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소발. 소발은 지식인이며, 도덕주의자였습니다. 무척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지식하고 완고합니다. 자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또한, 하나님께서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로 다가가려는 욥을 처음부터 정죄하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죄를 짓고 있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에게 심할 정도로 "악을 행하면 생명이 짧아 진다"고 저주를 퍼붓다 시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법의 논리도 없었습니다. 법에 의존해서 대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 지식에 의지해서 욥을 매장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기에 바빴습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소발의 대화가 확연하게 줄어듭니다. 지식의 한계입니다. 자신의 경험의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 본 곳까지만 알수 있습니다. 소발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과 고난의 경지에 대해서 욥과의 변론에서 쉽게 무너졌습니다. 나중에는 침묵합니다. 할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인생을 풀어 나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악인의 운명이나 미래의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친구들은 영적인 세계를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영적인 세계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친구인 욥이 고통을 겪고 있을때, 자신의 율법, 도덕, 지식, 경험, 가정을 가지고 정죄하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소하는 일의 최전선에 서 있던 존재가 바로 마귀였습니다. 하나님께 욥을 시험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던 이도 바로 마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귀의 간청을 허용하면서도... 공격 범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절대 생명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 주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마귀에게, 그리고 세 친구에게 욥을 통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세 친구들은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마귀처럼 욥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시간에 욥을 위해서 중보 해 주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세 친구들에게 가장 부족했던것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자비였습니다. 긍휼이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알아야 할 원리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control하시는가?>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십니다. 이 세 친구들의 논쟁과 변론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공격했으며, 욥의 상태가 어떠한지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셨기에 마귀가 공격할수 있는 범위를 정하실수 있으셨습니다. 마귀는 영혼을 공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욥에게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고.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결정을 하셨지만, 주님께서는 욥과 함께 친히 이 길을 걸어 주셨습니다. 욥과 함께 걷지 않으셨으면 욥은 결코 감당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훗날, 이 모든 것을 다 신원하시고, 갚아 주십니다. 사람에게 조그마한 의가 없다는 것을 욥의 세친구들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욥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세 친구들과의 모든 변론후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70여가지의 질문을 하십니다. 욥은 어느 한가지도 확실하게 대답할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하나님 앞에서 어느 하나도 말할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고난중에서 배워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인생의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지식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이해 되지 않는 일이 생길때는 하나님께 항변하는 부분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많은 갈등이 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강하게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하나님께 무릎 꿇으면 꿇을수록 하나님은 토기장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토기라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와 닿습니다.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식이 아닌 심장으로...마음속 깊이 새겨집니다. 연단 전에 주님과의 만남과 연단 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때의 느낌이 다릅니다. 더 깊습니다. 애절합니다. 영혼의 뜨거운 울림이 담겨져 있습니다. 욥의 연단의 결말이 그러했습니다. 잃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두배로 회복되는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륜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귀로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는 영적인 체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손해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럴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해지지 않은 환경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할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귀로 들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프게도, 고통스럽게도 하십니다. 영적인 원리를 깨닫는 것은 쉽게 되는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오직 하나님 한분만 계시면 된다고 생명걸고 고백할때 배울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까지 견디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까지 참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들의 작은 신음에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사탄을 완전히 결박할때까지는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원히시면 악의 세력을 어렵지 않게 제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금 결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적인 씨름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강함보다는 약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보다는 한 사람을 만드시고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사탄을 물리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Against 마귀> 욥을 훈련시키시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셨지만, 하나님은 원수 마귀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적 전쟁을 치룰수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사탄의 세력앞에서 담대히 주님 이름으로 나갈수 있는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욥입니다. 하나님은 욥 당시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길 원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마귀가 타락시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로 타락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생명거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으셨습니다. 오늘도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온전한 희생을 드린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두손에 사랑과 온유를 가득 채운채 십자가를 짊어 지고 골고다를 걷는 한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To. 세친구들> 그리고, 욥을 통해서 세 친구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으셨습니다. 아무리 세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욥을 통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보여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들, 세 친구는 자신의 경험과 경륜과 지식으로 욥을 가르지고, 주도하고 싶었지만...하나님은 욥의 편에 서 계셨습니다. 욥의 시련을 통해서 오늘날 많은 영혼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지만, 그 당시에 이 세 친구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Touch하기 위해서 욥에게 고통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욥에게 항변하며, 죄인이라고 추궁하면서 힘들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신원해 주시면서...그들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게 됩니다. 하나님의 정면돌파입니다. 욥을 안고 이 들 세친구를 변화시키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욥은 고난보다 이 친구들의 조소와 조롱이 힘들었습니다. 한 영혼을 변화 시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욥의 오랜 시간 동안의 인내가 이 세친구들을 Touch할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모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 영혼을 Touch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욥의 희생은 주변 사람을 변화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때-하나님의 신원>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신원해 주실때까지 참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신원이 나타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게 나타나려면 믿는 한 사람이 피흘리는 인내와 오래참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는 무의미 하기 때문입니다. 노력과 열심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진정으로 나타날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호하시기 전까지 욥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을때 세 친구들은 무너 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The End-하나님의 축복> 욥의 결국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원해 주십니다. 의인의 고난은 거룩함과 경건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어떠한 일에도 저주하지 않습니다. 잠시 넘어질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함께 하셨기에 욥은 연단의 결국을 볼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까지 입니다. 그 시간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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