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에서 작은 목자로. (7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40:1-2)
도저히 아무것을 할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내게 물으신다. 이런 저런 방법도 아무 의미 없이 다 무너져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다 시피한 내게 주님께서는 또 물어 보신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아프고, 또 힘들다. 그렇게 일어서려고 발버둥 쳐 보고,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지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 머리로만 느끼는것이 아니라, 온 뼈마디에서 깊이 느끼는 좌절과 아픔이다. 그런 내게 주님께서는 또 물어 보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할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베드로의 고백이다. 주님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수 없는 나. 수많은 좌절과 낙심으로 영적으로 무기력했던 우리.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그런 주님이 오늘도 한결같이 부탁하시는 것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주님.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조차도 제 능력으로 할수 없는것을 주님께서는 아시나이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당당시키셨도다" (사 53:6)
양들은 모두 제각기 자기 길로 가기에 바쁘다. 아무런 보호 수단도 없는 그러한 존재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길로만, 자기 고집으로만 가려고 한다. 목자의 품을 떠나 버리는 순간, 이리와 늑대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될것이다. 양들은 거기에 대한 대비와 어떠한 보호 수단이 자신에게는 없다. 양털을 깎을때조차 부들 부들 떨면서 울기만 할뿐이다. 온순한것 같은데 절대로 온순하지가 않다. 이기적이다. 목자의 마음이 없다. 그 마음을 헤아려 줄 기질이 없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목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누구보다도 목자가 잘 알고 있다.
조금 울기만 해도 목자는 어떤 양이 배가 고파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 힘들어서 우는지 잘 알고 있다.
목자이기 때문이다. 양은 목자에게 예민하지 않아도 목자는 예민하다. 양에게 모든 신경과 마음이 가 있다.
목자의 심정이다. 날씨가 조금만 흐려고, 추워도, 더워도... 목자는 양들만 생각한다. 수 많은 양들이 있지만, 목자는 어떤 양이 아픈지, 약한지, 습성이 어떠한지 구별해 낸다. 목자이기 때문이다.
양들의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으슥한 밤에 어떠한 야생 동물이 공격해 올수 있는지, 어떤 시간에 약한 양들을 노릴지, 양들은 무관심해도 목자는 잘 알고 있다. 항상 방어하고 있다.
목자의 손에 쥐어진 지팡이는 무지한 양을 끌고 가기 위한 도구이자, 양들을 늑대와 이리로 부터 방어하는 보호 무기가 된다. 그 지팡이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다.
우리가 그 양들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오직 자신의 일과 기도 제목에만 관심있는 이기적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일어나서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다른 양을 보호하고, 먹이라고 하신다. 어린 양일때는 목자의 심정을 절대로 알수가 없다.
목자의 위치에 섰을때, 목자의 역할을 할때만 그 목자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때에야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알수 있을것이다. 다른 영혼을 품는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일이 아니다. 비록 자신의 태에서 나온 자녀가 아니라 알지라도 영적으로 배앓이를 하는것도 또 다른 엄청난 아픔이 따른다.
다른 영혼의 아픔으로 힘들어 해 본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을 잘 알것이다. 다른 영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서 고통 받는 모습에 하얀 밤을 주님앞에서 지새운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픔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것이다. 그 순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던 나 자신의 못난 자아를 되돌아 보면서 주님 앞에서 통곡하게 될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진정한 회개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게 될때 주님 앞에 올려 드릴수 있는 내면의 깊은 고백이다. 다른 어린 양들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중보 하게 될때 함께 고통하면서 올려 드릴수 있는 내 자신의 영적인 가슴앓이가 회개다. 어린 양일때는 절대로 알수가 없다.
다른 양들을 사랑하게 될때, 아파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중보하게 될때, 그동안 몰랐던 내 자신의 모습도 깊이 깨닫게 된다. 중보하다가 회개하게 될것이다. 회개하다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것이다. 회복과 함께 부흥이 시작될것이다. 수 많은 영혼들을 꼭 안고 가게 될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것이다.
그런 어린 양에 불과한 우리를 목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시간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느껴지는 거절감과 버림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항상 성공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가득하다. 무엇을 해도 잘 할수 있을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것 같지만, 다른 사람의 실패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둡다.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의 머리로는 아는 듯 하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얼마나 무능력했으면 저렇게 실패만 할까? 얼마나 실력이 없으면 하는 일 마다 저렇게 안될까? 말은 하지 않지만, 내면에서 깊은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성품이 따뜻해서 머리로는 이해하고 울어 줄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깊은 통찰력과 영혼을 울리는 깊은 감동은 흘러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가 본 길은 성공까지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 본 곳 까지만 볼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다.
실패해보고, 아파 본 사람이 고난 받는 사람의 심정을 느낀다. 다윗이 그랬다. 수 많은 고난속에서 하나님만 바라 보았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얼마나 오랜 시간,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는지, 그 어떠한 사람도, 그 어떠한 도움도 다윗에게는 기쁨이 되지 못했다. 어떠한 인간적인 도움도 실제적으로 다윗을 그 어려움에서 견져 낼수도 없었다. 하나님께 그 자신의 기도가 거절되는것 처럼 느껴졌다. 버림받은 사람 같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잊혀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윗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런 다윗이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웃음 보다는 눈물의 시간이 더 많았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어느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그냥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영혼을 먹이고 입히는 목자였다. 고난가운데 진정으로 예배드릴수 있는 하나님의 지성소가 다윗의 벌거벗은 예배 가운데 임했다. 다윗의 장막이었다. 다윗의 찬양의 시간이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어린양을 감당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고통받는 마음을 먼저 체휼하는것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버림 받은것 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절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어린 양에게서 위대한 목자로 다시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그 만큼 다윗의 영혼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필요했다. 눈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어서서 다른 이스라엘의 모든 양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목자의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오랜 거절감이 다윗을 그렇게 만들었다. 침묵하셨던 하나님은 다윗을 한번도 떠나신 적이 없었다. 늘 감싸 안고 계셨다. 다윗이 울때 함께 울었고, 안아 주셨다. 진정한 목자이시기에 그렇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다윗은 나중에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다. 수많은 양들의 배신과 음모 속에서 다윗은 주님앞에서 용서를 받은 자신의 모습처럼 또 다시 영혼들을 용서하고 감싸 안았다.
두번째, 하나님의 Test의 시간이다. 때때로 우리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님께서도 시험하실때가 있다.
약속의 말씀은 눈물의 기도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될때 이루어 질것이다. 그 하나님의 영육간의 약속은 결국 우리가 목자가 되어서 다른 영혼을 섬기도록 인도할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젼은 하나님 나라와 영혼에 있기 때문이다. 영혼에 대해서 관심없는 비젼은 불순물이 가득한 자신의 야망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결국 하나님의 비젼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의 목자가 많아 질수록 더 많은 양을 돌볼수 있을것이다.
한명의 목자를 세우는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수많은 영혼들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목자의 마음 중심에 가장 중요한 Key는 순종이다. 작은 목자가 큰 목자의 뜻을 따라야만 양들을 제대로 이끌수 있다. 그 마음 중심에 무엇보다 순종으로 채우시길 원하신다. 순종이 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할때 하늘 문이 열리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방에 늑대와 이리가 우글대고 있다. 작은 목자가 큰 목자의 sign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때는 다른 양들을 함께 죽일수도 있다. 엄청난 타격이 하나님 나라에 있을수 밖에 없다. 다시 일으키시고, 세우시면서 하나님은 시험하고 테스트 하신다. 말이 안되는,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정말 그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감사하는지, 하나님만 의지하는지...그 모든 상황을 넘어서 순종할수 있는지 하나님도 저울질 하신다. 순종의 능력이 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비젼과 영육간의 큰 일을 맡기실수 있을것이다. 수 많은 영혼들과 하나님 나라가 연결되어 있다.
순종이 그 통로이기 때문이다.
모리아산 이야기다. 모리아산은 훗날 다윗의 장막이 되었고,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던 장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장소로 까지 연결이 된다. 절대 순종의 땅이다. 절대 헌신과 언약의 땅이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다. 밤새 기도하며 고민했던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아들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아들을 칼로 잡으려고 까지 했다. 그 순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2)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기 이전에 진정한 순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필요하다.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분량이 다 다를것이다. 그러한 순종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할수 있기때문이다. 아니면, 목자가 아니라 어린 양처럼 각기 제길로 갈것이다. 특별한 말주변과 재능, 달란트보다 지금 이 시대에 진정한 순종에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그 한사람을 찾고 계실것이다. 그 순종 뒤에 주실 여호와 이레...여호와의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그 상급과 열매를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고 싶어 하신다.
여호와 이레를 경험하는 Key는 순종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흘러 나오는 찬양이다. 그 순종이 영육간의 비젼을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것이다. 큰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극히 큰 관심이 뒤에 숨겨져 있다. 어떠한 비젼이든지 목자의 길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의 테스트를 믿음으로 잘 넘겨야 한다.
여호와 이레를 경험하게 될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큰 문이 열려지게 될것이다. 수 많은 양들과 함께 그 문을 들어 가게 될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열매는 아모리 산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연결된다. 진정한 여호와 이레의 위대한 예언적인 행위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여호와 이레의 진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었다. 그 분이 아모리산의 진정한 수양이요, 제물이셨다. 그 모습은 인류를 위해서 아들을 버리셔야만 했던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순종하려는 모습만 보여도 진정한 희생은 하나님이 다 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위해서, 순종의 모습이 필요하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2:6)
세번째, 마귀의 극심한 공격이 오는 시간이다. 어린 양이 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양떼들이 있는 울타리밖에서 어떠한 위험이 실제적으로 도사리고 있는지, 그 공격의 강도와 정도가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 아니면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면역력과 저항력이 없이는 현실의 공격에서 쉽게 쓰러져 버릴수 밖에 없다. 큰 울타리 밖에서 교묘하게 양떼들을 공격하는 그 음모와 세력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공격을 허용하시기도 하신다. 때가 되면, 무너지고 부서진것보다 더 크게 회복시켜 주시고, 일으켜 주실것이다. 이러한 마귀의 공격에서 얻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와 담대함이다. 엄청난 영적인 전리품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큰 목자가 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는다는것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다. 아프다. 힘들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이러한 공격은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다. 때로는 피부에 와닿는 위협의 정도가 클수 있다.
욥에게서 일어났던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욥의 결국이 어떠했는지..."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눈으로 보는 주님. 그 정도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피부에 깊이 와 닿고, 사탄의 역사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다. 자신을 하나님앞에서 지탱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들을 주님께 끌고 갈수 있다. 어린 양에서 목자로 서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사탄의 공격과 아픔이 있을수 있을것이다. 눈물이 더 많을수 있다.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클수 있다. 하나님보다 두려움이 더 많이 느껴질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엄청난 능력, 강하고 담대함.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이 우리 안에서 더 강한 메아리와 울림이 되어서 어느 순간에 폭발하게 될것이다. 사탄은 스스로 물러 가게 될것이다. 그림자와 흔적도 없이... 이런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다른 영혼을 감싸 안을수 있다. 어두운 세력으로 부터 강력한 중보기도로 보호 할수 있다. 때로는 건강, 물질, 가정, 자녀, 부부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하는 일들... 모든 일에서 실제적인 사탄의 공격을 받아 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수가 있을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꿈은 결코 구호만으로 안된다. 단순한 열정만으로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영권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능력이 필요하다.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한치 물러섬없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다양한 영적 전쟁의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피묻은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다.
이러한 마귀의 전면적인 공격에 주님 이름으로 맞설 때 받을수 있는 지혜와 권능이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셀수 없이 넘어지며, 그리고 다시 일어나면서 하나님의 꿈과 마음을 배우게 된다. 그동안 자신의 문제 때문에 정신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영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훈련의 목적 중 하나가 다른 영혼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함이다. 넘어짐과 일어섬... 연약함과 실패를 체휼함으로 다른 영혼과 공감하게 하시고, 다른 영혼의 아픔을 이해하게 하신다. 때로는 하나님께 거절 받은것 처럼 느끼기도 한다. 버림받은 사람처럼 그런 비참한 심정도 가져 본다. 그러나, 머지 않은 시간에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곧 통곡하게 된다. 우리의 모습이다.
조그마한 순종도 제대로 할수 없었던 우리가 어느 순간 부터 주님앞에 조금씩 굴복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순종이 얼마나 어려운지...하지만, 순종의 열매가 어떠한지 맛을 보면서 오직 예수를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된다. 그리고, 다른 영혼들에게 생명력을 나눠 주는 물댄 동산의 역할을 하게 된다.
눈만 뜨면 공격해 오는 사탄의 엄청난 공격들. 그 순간을 어떻게 견디었나 하지만, 곧 성령의 햇살속에서 평화로와 진다. 하나님께서 일하셨기에...이러한 영적 원리와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어린 양에서 목자의 역할로 거듭날수 있을것이다. 다른 영혼들을 살릴수 있는 사람. 다른 아파하는 사람들을 일으킬수 있는 목자에게 주님의 꿈이 머물러 있다.
주께서 미리 아신다. 내 중심과 마음이 어떠한지...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주께서 모든것을 아신다. 수많은 실패때문에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아픈 시간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도록 하신다. 이 모든것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이 얼마나 큰지 주님은 잘 아신다.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극히 작은 일부분도 감당할수 없는 우리들이라는것을 너무나 잘 아신다.
그래서 주님이 직접 이 일을 해 나가신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기도를 도우시고, 영적인 원리를 가르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키신다.
어린양에서 목자로 거듭나려는 우리 손에 쥐어진 지팡이가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에게 입혀진 목자의 옷이 성령의 전신갑주다.
지금도 사방에서는 성령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강력하게 역사하는것을 볼수 있다.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강력한 열정이 한 명의 어린 양조차 잃어 버리지 않으시려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함께 하고 계신다.
주께서 이 모든것을 아시고, 미리 앞서 나가신다. 수많은 어린 양을 위해서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여호와의 열심이 오늘도 우리의 기도 가운데 뜨겁게 불타고 계신다. 그 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큰 목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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