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축복 변환의 법칙 (73)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떄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6-7)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문제가 해결되기 전이 가장 어려운 시간일것이다. 기도하면 할수록 더 엉망이 된다면 마귀가 그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아주 집요하게 끝까지 놓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마귀의 강력한 공격을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그러실때가 많다. 그 영광은 누가 보더라도 이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수 있고, 아무리 마귀가 자기 방법대로 꽁꽁 묶고자 하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절대로 방해 할 수 없다는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배우고 얻게 되는 유익한 영적인 원리와 능력, 삶의 원리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을것이다.
분명한 것은 고난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고, 그 고난이 각자를 영육간에 깊은 성숙으로 이끌고 가게 됨은 우리는 알고 있다. 인생에서 육적인 눈으로 도저히 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이 될것이다. 하나님께서 건지신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신다는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각자의 인생에서 큰 축복으로 나타나게 될것이다.
수 많은 갈등들도 분명히 따르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내가 이 길로 가는게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이 길로 잘못 들어선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게 아닐까? 왜 기도 해도 나만 응답되지 않을까? 내 죄와 허물때문에 모든 것들이 막힌건가? 내가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불순종해서 일이 이렇게 되지 않는걸까?...끝까지 가 보면 알게 될것이다.
고난의 끝에서 예상치 못했던 어느 순간에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고백은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역전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전에 약속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더 크게 응답이 되었네. 정말 신기한 방법으로 일이 해결이 되었네..."
어떤 이유의 고난에서든, 어떤 모양의 고난이건 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푸시지 못할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고난의 분량과 시간이다. 이런 시간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고난의 깊이를 비교하려고 한다. 자신이 훨씬 더 긴 시간동안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진다.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인간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수 있는데 자신의 문제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질때도 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것은 우리의 모든 환경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허용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환경은 절대로 만들어 질수 없다. 우리가 하찮게 보이는 환경과 만남까지도 하나님께서 만드시기 때문에 존재하는것이다. 고난의 분량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계획과 많은 연관성이 있다.
앞으로의 소명과 Calling과 많은 관련이 있다. 지금은 미래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앞서 나가셔서 계획을 미리 세우신다. 우리가 무슨일을 영육간에 해야 하는지 하나님은 분명히 아신다. 지금 훈련시키시는 내용을 보면서 앞으로 맡기실 일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참 중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많은 영육간의 교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의 모습은 이 어려운 시간을 넋두리하는데 쏟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 불만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깨닫는것도 없고, 영육간에 어떠한 원리를 배우는것이 없이 시간을 허비한다는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초점 맞춘다. 왜 이런 시간을 허락하셨는지,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것은 무엇인지...훈련과 연단때문에 모든것이 다 망가지다 시피 해서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지 몰라도,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계획이 숨어 있다. 지금은 보잘것 없어 보여 지지만, 하나님의 때가 될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며, 높이실지 우리는 모른다. 훗날, 그 훈련 받은 사람의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간증과 영적인 교훈이 동화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을것이다. 그 사람이 받았던 고통과 연단의 분량과 시간보다 하나님께서 손에 쥐어 주시는 결과와 열매만 보고 부러워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 사람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하나님 앞에 생명건 시간이 반드시 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것을 마귀가 미리 알고 모든것을 차단하고, 무너뜨리려고 전방위적인 공격을 퍼 부었음을 말할것도 없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훈련이 마무리 되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서 마음껏 비상할때도 모든 일이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십자가 뒤에 감추려고 애쓴다. 세상의 명예와 물질에 대해서도 취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애쓴다. 아무리 좋은 세상적인 축복이 허락된다고 할지라도, 흔들림없이 하나님앞에서 어린 아이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결코 작은 지혜가 아니다.
마귀도, 세상도 두려워 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러한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이 이미 축복으로 변형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을 참지 못한다. 자신이 이러한 길에 왜 있는지,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여기서 무엇을 배울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관심밖이다. 그냥 힘든것이 싫다. 고난의 시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다가 얼마 뒤에는 금방 풀이 죽어 버린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모습을 계속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유난히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부분과 고난때문에 망가진 부분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 말이 많아진다.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마음맞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몇시간씩 속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해 지는것 같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해주는 사람이 생긴것 같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 뒤에 자신이 믿었던 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저런 속 마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흘리고 다녔던것을 알게 된다.
말이 와전된다. 오해를 받게 된다. 믿었던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한 이야기인데...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이야기 안 할줄 알았는데...그러나 이미 늦었다. 주변 모든 사람이 다 알아 버렸고, 말이 확대되어서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린다. 울고 싶은데 뺨을 함께 맞게 되었다.
남편을 보아도, 아내를 마주 대할때도 짜증이 난다. 자신이 배워야 할 영적인 원리와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바로 옆 사람이 문제의 원인인것 처럼보인다. 영적인것 보다 세상적으로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는데 마음이 가 있다. 모든 수단 방법을 다 사용한다. 때로는 먹혀 들어가는것 같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래밭에 세워진 모래성일 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같다. 이 순간이라도 하나님께 돌이킬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반드시 건지신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고, 어리석은 판단을 한다고 미워하시는것이 아니다. 우리의 분량이 그것밖에 되지 않음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
아무리 지혜로와도, 그 지혜때문에 문제가 생길수 있으며,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같아 보여도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로 더 귀하고 아름답게 세울수 있다.
지혜로와서 훈련이 빨리 끝나고, 지혜롭지 못하기에 연단이 계속 지연될 것이라고 쉽게 단정지을수 없다.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적인 약점과 연약한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나님만이 아실것이다. 각자마다 고난의 분량과 시간이 왜 다른지를...
문제는 고난 가운데 있을때, 과거형의 넋두리 시간을 보내게 되면 마음이 너무 힘들게 될것이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것 처럼 마음이 힘든것은 없다. 믿음은 항상 미래형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바라보며 준비를 시키신다.
오늘 고난받는 시간에 지금보다 나은 영육간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없다면, 오늘 이렇게 까지 힘든 연단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실것이다. 자신이 받고 있는 연단에 대해서 뒤집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복선이 그 가운데 반드시 숨어 있다.
고난 가운데 미래형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넘어졌다가 일어났다가 계속 반복한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을것이다. 그 만큼 더 무르익어가고 있을것이다. 비슷한 연단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 깨닫는 영적인 원리과 인격적인 성숙이 더 깊어 지고 있을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에 큰 가치를 두고 계신다. 우리의 믿음을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표현하신다.
결국은 믿음이다. 고난의 첫번째 목적은 믿음의 훈련일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것이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절대 신뢰 할수 있는 그 믿음. 그 믿음을 갖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훈련에 연단을 시키신것이다. 어떠한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시는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천만명의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 중심을 잡는 시간이 연단이다.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이 믿음때문에 순교까지 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그랬다.
우리는 믿음을 너무 쉽게 던져 버릴때가 많다. 쉽게 보이지 않으면, 금방 응답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값어치 없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우실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부르셨던 아브라함을 크게 보셨던것도 그 중심의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소망으로 연결된다. 미래형의 시간이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 이미 연단받을 대로 연단받은 그 믿음, 인간적인 욕심의 불순물이 불태워진 순전한 믿음으로 꿈꾸는 소망에는 하나님의 꿈이 담겨져 있다.
그 소망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반드시 이루어 진다. 그 순전한 믿음에 대한 보상은 앞으로 이루어 질 소망이다. 연단가운데 소망을 가지다가도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아서 포기하고, 눈물 지어야만 했던 그 소망과 꿈. 연단 뒤에 주어지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과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소망을 이루어 나가실것이다.
물댄 동산처럼 지속적으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그 은혜와 은총.
연단뒤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체험하게 될때 감동하고 감탄하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소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순전한 사랑으로 연결된다. 소망이 하나님의 비젼에 대한 Hardware를 만들어 줄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비젼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software와 원동력의 역할을 하게 될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있는 고난의 시간, 역경의 시간. 그 마지막의 문을 열고 들어 가는 Key는 우리가 들고 있다. 끝이 난다고 하더라도 영육간에 받는 상급과 열매는 천차만별일것이다.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면 그 길에서 얻을수 있고, 배울수 있는 모든것을 우리것으로 만들어야 할것이다.
하나님께 무릎으로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고난이 반드시 축복으로 바뀌게 된다. 고난의 축복 변환의 법칙이다. 다윗이 그랬다. 요셉이 그런 인생을 살았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고난이 끝이 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영육간의 축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기억해야 할것은 고난의 축복 변환의 법칙을 작동시키는 것은 기도와 눈물과 하나님의 마음이다.
감사와 찬양, 예배가 살아나는 곳에서 이러한 놀라운 법칙이 상식이 되는것을 잘 볼수 있을것이다.
이런 법칙의 열매로 나타나는것이 감사의 눈물이다. 만남의 축복이다. 새로운 환경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이다.
욥과 세 친구를 기억한다. 욥의 이루말할 수 없는 역경과 아픔가운데 있을때 친구들은 정답만 주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감싸 안고 위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하고 허물을 들추어서 찌르는데 온 힘을 다했다. 고통가운데 있는 욥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직접 신원해 주시고, 그 길을 친히 열여 주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하고 원통한 가운데 입술을 조심했던 욥, 그 시간까지 함께 있어주었지만, 자신들이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요하며, 아프게만 했던 욥의 세 친구에게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결말은 완전히 달랐다.
그 세친구들은 하나님의 책망이 따른후, 욥의 제사를 통한 용서였고, 욥은 하나님의 영육간의 축복이었다. 하나님의 용서도 큰 축복과 은혜이지만, 욥의 결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모양만 다를뿐,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의 양이 무겁다. 하루라도 빨리 고난이 축복이 되기를 소원한다.
때로는 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수 있다. 가끔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수 있다. 고난의 마무리를 할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우리 손밖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문을 여는 중요한 Key를 우리가 들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 중심과 태도다.
마음 중심이 중요하다. 마지막 테스트를 잘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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