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Weekly칼럼(51-100)

함께 하는 것이 사역이다. (59)

Joseph Lee 목사 2013. 10. 31. 05:07

 

 

함께 하는 것이 사역이다. (5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 9-18)

 

힘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어떠한 가르침과 답이 아니다. 그 시간에 함께 있어 주는것이다. 아무말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과 영은 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인사말로 하는 이야기인지...또한, 별 말이 없더라도 그 어려운 시간에 함께 있어 주는것 자체가 고맙게 느껴질때가 많다.

옆에서 특별한 무엇을 하는것이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들어 주는것 만으로 마음에 깊은 위로가 될때가 있다.

멀리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끼리도 필요한 부분일것이다.

힘들때 특별한 무슨 도움이 안되더라도 그 시간에 손을 잡아 주는것이 얼마나 기억에 남는지...이야기 들어 주는것이 얼마나 마음에 따뜻한 위로가 되는지...

 

함께 있어 주는것이 사역이다. 그 어려운 시간에 함께 공감해 주는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정답을 주고, 가르치는것에 사랑이 없다면 사역을 위한 사역일수 있다. 내 열심일 수 있고, 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일수 있다. 그 영혼의 눈높이에 머물러 주는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것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보여 주는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길때만 가능하다.

 

가장 가까이에서 많은 영혼들이 아파하며 신음하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통하고 있다. 특별한 은사가 없더라도, 말씀을 잘 몰라도,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할지라도...그 영혼과 함께 하는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임한것이다. 그 시간이 골고다 언덕을 말없이 걸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 조그마한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영혼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실것이다. 공감과 감동만이 영혼을 Touch할수 있을것이다.

 

우리도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하나님앞에 나가면 갈수록 더 많은 문제들 때문에 씨름할수 있다.

그런데,우리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은혜의 비밀이 있다. 오늘밤은 그 문제로 신음하며 기도하더라도, 그 다음날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평안과 힘을 다시 얻어서 생활하고 주어진 일을 다시 하게 된다. 죽을것만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하나님께서 꼭 안고 계시니 얼굴에 오히려 빛이 나는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도 한다. 모든 일이 잘되는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평안한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힘들어도 힘든것 처럼 보이지 않는것은 하나님의 영이 꼭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그렇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문제가 힘들더라도 더 힘들고 아픈 사람을 보면 견디질 못한다.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 못한다.

함께 기도하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하면 그 영혼의 필요에 민감할수 있는지 고심하며 하나님께 물어 본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문제만 신경쓴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것 처럼 느껴지고, 다른 영혼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누가 아파하더라도, 말로만 안됐네요. 힘들겠네요. 아무 관심도 없기에 그 다음에 만나서 안부조차 물어 보지 않는다. 기억조차 못하기 떄문이다. 누가 힘들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오히려 듣기 싫어한다. 나랑 상관없는데...나 보고 어떻게 하라고. 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 두마디 위로의 인사말을 하지만, 상대방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대해 주는지에만 민감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기도를 해도 늘 자신이 주제이고, 자신의 문제만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누구를 더 섬긴다고, 덜 섬긴다고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음 중심에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고칠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바꿀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힘든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겠지만, 영적 눈높이가 다른 영혼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는것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 혼자 기도하고, 나아간다고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다.

함께 가야 하는것이다. 아픈 사람이나 영적 눈높이가 다른 사람들...모두 함께 걸어가야 하는것이다.

기다려 주어야 한다. 정말 쉽지 않는 일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힘들다. 대화가 안되는 사람처럼 어려운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은 대화가 자기 중심적이다. 자신의 문제에 관심 가져 주면 좋아하고, 다른 영혼에는 관심이 없다. 그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나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배워 나가는 축복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남자 집사님의 이야기이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을 모르는 그 집사님의 친구 분이 불치병에 걸려서 나날이 몸이 약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일을 제쳐 두고, 틈틈히 그 친구를 위해서 병원과 그 분 집에 가서 최선을 다해서 섬겨 주었다. 처음에는 잠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섬기던것이 그 친구가 나날이 약해지면서 더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다. 그 집사님 자신의 일도, 가정의 일도 해야 할 부분이 많이 있는데 모든일을 뒤로 미룬채 열정적으로 친구를 돌봐 주었다. 옆에서 지켜 보면서, 저러다 쓰러지실라. 그 친구분 가족들도 있는데, 집사님이 저렇게 까지 하셔야 하나, 혹은 집사님의 건강이 상하면 어떻게 되나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다. 잠시 뵐때마다 친구때문에 과로하시는 집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저릴때가 많았다.

몇개월이 흘러서 그 친구분의 병세가 나날이 약화 되었다. 그 와중에 그 집사님의 인도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기도를 조금씩 배워 나갔다. 그리고, 이 병만 치유가 된다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고백까지 하는 친구분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증세는 반대로 더 약화 되었다. 하루 하루 갈수록 건강문제에 있어서 더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럴지라도 이 집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더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정신이 맑지 못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날...그 병상에 누운 친구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이 내 마음을 울리기 시작했다."...전 하나님 믿기로 작정했고, 끝까지 하나님 믿다가 하나님 품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건강의 상태가 극한 상황으로 가는 동안, 기도하는데 왜 응답이 없습니까? 항변하며, 원망할수 있지만, 이 친구분의 마음은 몸의 상태와 상관없이 마음이 더 열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붙잡고 계셔서 그렇겠지만, 그 고백의 배후에는 집사님의 말없는 섬김이 큰 역할을 했음을 잘 알고 있다.

오고 가는 발걸음에서 하나님은 일하셨다. 그 시간 동안 성경공부를 할수 있는것도 아니었고, 많은 기도를 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 친구는 집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낄수 있었던것이다.

"그래...내 몸은 점점 약해지지만, 내가 누구보다 자네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것을 느낄수 있어. 자네 부부처럼 어느 누구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나를 대해 준 사람은 없었거든...하물며 내 형제들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자네를 통해서 느낄수 있어서 고마워..." 그 친구분의 마음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 오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려운 법이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없이는 사람은 절대로 변화 될수 없다. 어떤 강요와 억압으로, 설득으로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 인격적인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마음 중심에 깊은 감동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부분을 Touch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럴때, 영혼의 대지진, 영혼의 대변화가 오는것이다. 이 감동을 주기 위한 통로로 많은 경우, 사람을 사용하신다. 은혜 받은자를 통하여 그 사랑을 보여 주시기를 즐겨 하신다.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가장 큰 기적이다.

가는 곳곳마다 영혼이 변화된다면, 그 사람의 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의 통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파이프 라인이 연결되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것이다.

 

우리는 몇가지 새로운 원리를 얻거나 알게 되면, 잘 따라 오지 못하는 사람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바로 옆 사람을 보면 안스럽기도 하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궁리해보지만, 결국은 그 어떤걸로도 소용이 없다는것을 알고 좌절을 겪기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 좌절과 답답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도 함께 깨닫는다.

나 역시 스스로 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이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셨다는 사실을...더 깊이 알게된다. 또한 영적으로 자라기까지 누군가가 말없이 기도를 쌓아 주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런 좌절 속에서 지나 온 시간을 되돌아 보면서 영적으로 어렸던 시절을 생각할수 있다면 큰 은혜 일것이다.

 

어떤 아들의 엄마가 매일 아들과 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이 공부 하는것도 못 마땅하고,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지 못한것도 마음에 못 미더워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려고 하니 답답하고, 자꾸만 말하다 보니 잔소리가 되어서 아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 "너 이렇게 해서 뭐가 될래? 너 친구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넌 왜 이것 밖에 안되니? 아님 말씀이나 기도를 좀 열심히 하던지...교회도 그렇구, 학교도 그렇구. 엄마는 널 보면 이제 많이 지친다"

어느날 그 아들의 엄마에게 성령께서 친히...기도 가운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스크린 처럼 보여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때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집을 나가서 들어 오지 않았던것, 학원간다고 말하고 친구랑 놀러 간것, 하지 말라던것을 몰래 한것, 시험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엎드려 자던것, 주일 교회 가기 싫어서 시내를 배회 하던것...'

자신도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모습...그리고, 그 시간을 기다려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엄마의 어린 시절 보다 아들의 지금 모습이 훨씬 더 낫다 라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펑펑 울었던지...하나님을 핑계로 자신의 욕심대로 아들을 키우려고 했던것, 아들의 인생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던것, 아들의 인생을 통해서 자신이 못했던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야망... 하나님께서는 그날밤 그 분의 마음을 Touch하셔서 그 집사님의 인생에 대지진이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은혜는 항상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기도하다가 마음과 몸이 뜨거워 지는것보다 훨씬 더 큰 은혜가 있다. 찬양 가운데 눈물 흐르는것만이 은혜라고 생각하면 더 나가지 못할것이다.

가장 큰 은혜는 영혼의 변화다.

내 자신이 하나씩 부서지는것... 깨닫지 못했던것을 깨닫게 되는것이 은혜다.

답답해서 견딜수 없는 사람을 보며 "나의 어릴적 모습은 더 그랬는데, 나의 예전 모습은 더 엉망이었는데..."

다시 되새기며 다른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다면 그곳에는 이미 영혼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프고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할수 있을것이다. 답답해서 견딜수 없는 사람을 만나도 강요하지 않을것이다. 온유한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 낼것이며, 기도하면서 기다려 줄것이다.

자신이 그런 시간을 지나 왔기에 누구보다도 그러한 영혼의 마음을 잘 이해 할것이다.

또한, 이 시간을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될것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모든 사람이 다 피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주셨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피해서 몰래 물 길러 나오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다 피하는 그 한 사람을 예수님은 친히 만나기 위해서 우물가에서 기다리셨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조심스럽게 접근하셨다. 함께 공유할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셨다. 바로 물이었다.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가장 평범하고, 쉬운 것을 가지고 접근하시는 경우가 많으시다.

우리 주위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은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그리고, 자신을 만나주는 예수님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는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시며 마음을 만지셨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문이 열리기 까지 기다리고 또 가다리신다. 또한, 그 여인의 약점을 부드럽게 건드리셨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지만, 꾸짖기 위함도, 책망하기 위함도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복잡해 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갈수가 있을까. 때로는 강하게 밀어 부쳐야 하지는 않을까...갈등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지혜와 분별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예수님의 방법은 공감과 온유와 감동이었다. 그리고, 기다려 주셨다.

우리의 약점도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 나올때는 영혼의 찔림과 함께 내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좌절을 위한 책망이 아니다. 대책없는 분노가 아니라 영혼을 세워주기 위한 하나님의 격려이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회개는 마음을 가볍게 한다. 평안이 함께 임한다. 성령의 기쁨이 넘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감동이 머물러 있다.

 

주변의 많은 영적인 사역자를 만난다. 성령의 말할수 없는 능력으로 충만한 사역자들도 많이 접한다.

질병도, 마귀들도 무너 지는 사역의 모습도 많이 볼수 있다. 하지만, 기적으로는 영혼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게 되고, 감사없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으로 연결 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중요한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기적이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기다림만이 그것을 성취할수 있다. 감싸안는 사역의 능력은 영혼을 변화 시킨다.

영혼의 대지진을 일으킬수 있는 그런 사랑의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나의 약한 부분이다. 우리에게 채워져야 하는 부분이다.

영적으로 중무장하고 싶다. 동시에, 영혼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아픔을 내 생각대로 책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싸 안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위해서 나 홀로 우물가에서 기다려 줄수 있을까? 그 사람의 약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따뜻함으로 세워 줄수 있을까? 다른것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려울때 함께 있어 주는 사역자가 되고 싶다.

예수님도 우물가의 여인가과 함께 있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변화가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가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꼐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자가 더욱 많아" (요 4:3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