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Column(5107회)■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4:49-54)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는 절박한 아버지였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버나움에서 20여 마일이 떨어진 가나까지 찾아와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의 소원은 하나였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셔서 고쳐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은 살아 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믿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역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안심하고, 상황이 변해야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런 증거도 보여 주지 않으신 채 오직 말씀만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걸어갈 것인지를 물으십니다.
본문에서 가장 깊이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은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는 말씀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직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병이 나았다는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은 응답을 본 후에 생기는 확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때문에 먼저 순종하는 결단입니다.
헬라어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는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실상"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는 희망이나 기대를 넘어 "기초, 토대, 확고한 실재"를 의미합니다. 왕의 신하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섰습니다. 말씀을 삶의 가장 견고한 토대로 삼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 속에는 수많은 가나와 가버나움 사이의 길이 있습니다. 기도는 드렸지만 응답은 아직 보이지 않고, 약속은 받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변함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조용히 물으십니다.
"너는 결과를 보고 믿겠느냐? 아니면 내 말을 믿고 걸어가겠느냐?”
진정한 믿음은 보이는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현실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실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주님의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고, 기적은 그 믿음의 길 위에서 만나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오늘도 깨닫게 됩니다. 기적은 믿음의 출발점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환경보다 말씀을, 감정보다 말씀을,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말씀을 더 의지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아직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도 증거를 찾기보다 말씀을 붙들고, 결과를 확인하기보다 먼저 순종하며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 말씀을 신뢰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Joseph Lee 목사 (https://my-jc.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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