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Column(5105회)■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1-42)
요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9장을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흘리신 눈물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시는 주님, 그리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주님. 같은 눈물이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눈물이 슬픔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깊이 묵상할수록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흘러 넘친 흔적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주님께서 왜 우셨을까요?
죽음 앞에 무기력하셔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아래 신음하는 사람의 실존을 보셨고, 죄로 인해 깨어진 창조세계를 보셨으며, 그 안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슬픔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말과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눈물은 더욱 깊은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거부하는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준비하는 길 위에서도 자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심판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애통하셨고, 진노보다 먼저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묵상 가운데 한 헬라어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페리커레시스- περιχώρησις>입니다. 본래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사랑의 연합과 내주하심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깊은 신학적 표현입니다. 서로 안에 거하시며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말합니다.
주님의 눈물을 바라보며, 그 눈물이야말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의 확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만 머물던 사랑이 아니라, 죄인 된 인간을 그 사랑의 교제 안으로 초대하시기 위해 흘리신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고, 슬픔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눈물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사랑은 거리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님의 눈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묵상할수록 마음에 다가오는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결과보다 관계를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덤을 보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사건을 보았지만 주님께서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어 가면서도 종종 하나님의 능력만을 기대할 때가 있습니다.
기적을 원하고 응답을 원하며 문제의 해결을 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문제 해결 이전에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 이전에 눈물을 보여주셨고, 영광 이전에 함께 아파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사랑의 완전함이었습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 머물며 조용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 흘리는 영혼을 서둘러 일으켜 세우기보다 먼저 곁에 앉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영혼을 향해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눈물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눈물과 누가복음 19장의 눈물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묵상할수록 한 가지 소망이 깊어집니다. 주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도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함께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처럼 따뜻한 시선을 품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을 향해서도 주님의 애통함을 조금이나마 닮아 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눈물은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도 세상을 향해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바라볼 때마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 배우게 됩니다. 사랑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은 상대의 눈물 속으로 들어가 함께 머물러 주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전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 속에 담겨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Joseph Lee 목사 (https://my-jc.tistory.com)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자라는 깊은 영성 (욥42:1-5) | Loving Worship | Joseph Lee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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