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Column(5103회)■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12:26-30)
주님께서는 염려하는 사람의 마음을 향해 먼저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꽃을 바라보라는 감성적인 초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다스림의 원리를 배우라는 깊은 부르심처럼 느껴졌습니다.
백합화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존재 자체를 가장 아름답게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깊은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려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고, 부족함을 대비하며, 불안을 통해 삶을 통제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내면을 향해 “근심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메테오리제스데 (μετεωρίζεσθε)는 영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마음이 허공에 떠서 흔들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혼의 중심이 하나님께 깊이 닿지 못한 채 내적으로 흔들리고 요동하는 상태입니다.
묵상할수록 깨닫게 됩니다.
염려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다스림의 문제입니다.
누가 삶의 중심에 앉아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진 영혼은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만, 자기 힘으로 삶을 책임지려는 영혼은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염려의 뿌리에는 환경이 아니라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하나님과 분리된 자아의 독립성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려 했던 순간부터, 영혼 깊은 곳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영혼은 늘 결핍과 허무를 느끼며, 미래를 자기 손 안에서 통제하려고 합니다.
결국 염려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벗어난 영혼의 방황을 드러내는 내적인 모습입니다.
백합화는 다릅니다.
스스로를 꾸미지 않아도 하늘의 공급 아래 머물러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창조주의 돌보심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존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보다, 전적으로 의탁하는 존재를 통해 하늘의 풍성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필요 자체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필요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세상은 생존을 추구하지만, 아버지를 아는 영혼은 공급보다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게 됩니다.
오늘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말씀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공급자가 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할 때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역인 미래의 시간을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신뢰하는 순간부터 인생은 사람의 계산이 아니라 온전한 맡김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돌아보면 염려는 늘 현실을 크게 보게 만들었고, 믿음은 하나님을 크게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염려는 영혼을 허공에 띄워 흔들리게 하지만,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깊이 뿌리내리게 합니다.
오늘도 백합화를 바라봅니다.
말없이 피어 있지만 하늘의 질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진 생명은 애쓰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백합화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됩니다.
■Joseph Lee 목사 (https://my-jc.tistory.com)
백합화 한 송이
바람 앞에 흔들려도
하늘의 손길 안에 조용히 머뭅니다.
내일을 붙들려 애쓰던 마음 내려놓을 때
아버지의 사랑은 들풀에도 스며듭니다.
염려는 영혼을 허공에 띄우지만
믿음은 하나님 품에 깊이 뿌리내립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입히고, 내가 너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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