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Column(5101회)■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막9:17-20)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주님의 이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깊은 탄식처럼 들려옵니다.
오랫동안 곁에 두고 가르쳤고, 하늘의 권세를 보여주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 경험하게 하셨는데도 여전히 제자들의 중심이 주님만을 전적으로 붙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절박했습니다. 간절했습니다.
마지막 희망처럼 제자들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알고 있었고, 이전의 경험도 있었지만, 그 순간 하늘의 권세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말씀 속 주님의 탄식에는 하나의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헬라어 <아피스티아- ἀπιστία>, “믿음”을 뜻하는 헬라어 <피스티스>에 부정 접두사가 붙어서 “믿음 없음, 불신앙”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마음 중심에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사용하지만, 삶의 여정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 앞에서는 여전히 자기 경험과 익숙함을 더 붙드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주님이 하신다”는 의식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익숙함에 깊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역의 경험이 쌓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 반복되면서 처음 주님을 따르던 그 겸손이 희미해졌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은혜에 익숙해질 때 가장 위험해집니다.
처음에는 무릎 꿇고 울며 구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기보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방법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간절함은 줄어들고, 사람의 말이 많아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존은 약해지고, 사람의 능숙함만 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사람의 익숙함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늘의 권세는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마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중요한 Key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보다 먼저 제자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귀신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박함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가장 두려운 상태는 넘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주님 없이도 괜찮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루가 흘러가고, 말씀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아도 믿음의 모습은 유지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역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익숙한 언어로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보다 자기 경험을 더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무릎보다 사람이 먼저 움직이고
기다림보다 조급함이 앞서고,
의존보다 사람의 열심이 익숙해집니다.
바로 그때 <아피스티아- ἀπιστία>가 조용히 영혼 안으로 스며듭니다.
믿음 없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부인하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는 영적인 무감각함으로 나타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능력은 사람의 열심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권세는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만 흘러갑니다.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 위에만 하늘의 능력이 머뭅니다.
믿음은 많은 것을 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가난한 심령입니다.
“주님 없이는 안 됩니다”
이 고백이 사라지는 순간, 이미 <아피스티아- ἀπιστία>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무릎 꿇게 됩니다.
■Joseph Lee 목사 (https://my-jc.tistory.com)
[러빙 Zoom 기도] 내면의 질서 회복, 두려움을 다스릴 때 열리는 문 (창1:28) | Joseph Lee 목사 | Loving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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