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Column

[Loving 칼럼] 엘레에오(ἐλεέω), 예수님은 왜 바디매오의 이름을 남기셨을까

Joseph Lee 목사 2026. 5. 24. 18:52

■Loving Column(5098)■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10:46-50)

 

길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께서 왜 그의 이름을 굳이 남겨 두셨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말씀은 수많은 병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셨는데, 유독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상에서 잊혀진 한 사람의 이름을 하늘에서는 끝까지 기억하고 계심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를맹인 거지라고 불렀지만,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건강의 치유 이전에 존재를 회복시키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간절함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나 기적 행하는 분 정도로 여겼지만, 바디매오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눈으로 메시아를 알아보았습니다. 육신의 시력은 없었지만 영적인 통찰은 그 어떤 군중보다도 깊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바디매오만이 예수님이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깊이 와 닿는 헬라어가 하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에 사용된 단어, <엘레에오- λεέω>입니다. 흔한 동정이 아닙니다. 상대의 고통 안으로 들어가 함께 짊어지고 걸어가는 자비를 뜻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보다 예수님의 긍휼을 먼저 붙들었습니다. 그는고쳐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깊이를 봅니다. 기적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붙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놀랍습니다.

눈 앞에 생생히 펼쳐 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막을수록 그의 외침은 더욱 커졌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으면 침묵하려 하고 거절 당하면 물러 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달랐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주님을 향한 간절함이 더 컸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해 속에서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의 믿음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메시아를 오래 바라보며 깊이 뿌리내린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일까?

당시 맹인 거지에게 겉옷은 생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추위를 막아 주는 유일한 방패였고, 가진 것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것을 벗어 던졌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치유해 주시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이전에 익숙했던 삶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순서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은 보게 된 뒤에 익숙한 것을 내려놓으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 모습도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은 이미 그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문제보다 마음의 태도와 중심을 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돈도, 안정도, 사람들의 인정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백은 시력 회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보는 눈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주님을 따라갈 영적인 통찰을 원했습니다.

실제로 눈을 뜬 후 그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동행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바디매오를 통해 깨닫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크게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들의 침묵 강요보다 주님의 긍휼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직 눈에 보이는 응답이 없어도 먼저 겉옷을 벗어 던지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와 같은 고백을 오늘 올려 드립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Joseph Lee 목사 (https://my-jc.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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