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Column(5096회)■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삼하16:7-10)
인생에는 억울함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일로 무너져가는 그 곳에 누군가가 돌을 던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다윗에게 시므이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왕궁을 떠나 맨발로 감람산 길을 오르던 다윗은 이미 깊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지만 더 이상 왕처럼 보이지 않았고, 수많은 군사를 거느렸으나 아들의 처절한 배반 앞에서는 너무도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그 처절한 발걸음이 머무는 길을 따라와 저주합니다.
돌을 던지고 흙을 날리며 다윗의 지나온 시간과 상처를 조롱하고 저주합니다.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또 다시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겨우 추슬러 일으키고 있는데 누군가는 가장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찌를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에 가장 거친 말들이 심장 깊은 곳에 꽂히는 시간입니다.
그때 다윗의 충복, 아비새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삼하16:9)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왕을 모욕한 자를 제거하는 것은 충성처럼 보였고 정의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16:10)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시므이가 저주 하는 입술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 뒤에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악함을 기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지 우연이나 사람의 자의적인 행동만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묵 가운데서도 자신의 영혼을 만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두려움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하슈가하- הַשְׁגָּחָה>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 그리고, 눈동자처럼 지켜 보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오늘은 <하슈가하- הַשְׁגָּחָה>를 깊이 묵상하면서 마음이 저리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제가 영광 가운데 있을 때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어려움과 아픔을 당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통치를 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좌를 잃고 쫓겨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더 깊은 영적 세계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왕권은 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가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다른 점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보호하고 변명하려 했지만,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울은 창을 던졌고, 다윗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을 든 사울이 아니라 눈물로 걸어가는 다윗 편에 서 계셨습니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이깁니다.
깊은 영적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존심이 깨어지는 것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의와 열심, 그리고 스스로의 정당함이 무너져야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높아질수록 자기 억울함을 증명하려 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침묵 속에서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다윗은 시므이를 죽일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일 것입니다.
즉시 반응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지만, 하나님께 맡기며 기다리는 것은 영적인 믿음입니다.
칼을 쥐는 것은 쉽지만, 상처 입은 채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은 어렵습니다.
진정한 영성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Joseph Lee 목사 (https://my-jc.tistory.com)
'2026 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Loving 칼럼] 휘포모네(ὑπομονή), 주님의 침묵은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1) | 2026.05.23 |
|---|---|
| [Loving 칼럼] 야레(יָרֵא),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잠잠해지다 (2) | 2026.05.21 |
| [Loving 칼럼]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 현실보다 하늘의 풍성함을 바라보는 영혼 (3) | 2026.05.20 |
| [Loving 칼럼]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오늘은, 제가 그 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2) | 2026.05.19 |
| [Loving 칼럼] 쉬네르고스(συνεργός), 그들은 현실과 영성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2) | 2026.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