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영적인 조율이 필요합니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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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영적인 조율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의 적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각자의 생각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를 하면서, 획일화된 자신 만의 신앙의 틀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영적인 습관 속에서 stereotype화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그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것은 그 말씀이 생명이 되고, 삶이 되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신앙의 태도가 정말 건전한 것인지 말씀을 통해서 조율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젊을 때는 끊임없이 배우려고 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흡수해서, 그 중에 좋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좋은 멘토와 책, 강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영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자신 나름의 stereotype화된 신앙의 틀을 가지게 됩니다. 영적인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자신만의 신앙의 stereotype에 어느 정도 들어 맞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stereotype화된 신앙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영적으로 보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배우기 보다는 자신이 아는 것으로 판단하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대로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하는 시간입니다.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모두가 율법주의가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와 치열한 영적인 전쟁을 벌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온 마음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자신들의 오랜 신앙 관습과 전통에 매이지 말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셨던 진리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외쳤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흘러 넘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유대주의가 끝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에서도, 사도 바울이 그렇게 대적하려고 했었던 율법주의가 살아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율법적인 신앙은 자유가 없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자기 만족으로 하려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나 교회, 공동체가 정해 놓은 신앙의 기준을 잘 따라 가면,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력과 기쁨이 없더라도 자신이 정해 놓은 목표를 달성했다는 데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와 섬김을 많이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은 영적인 착각에 쉽게 빠져 들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예배에 발 도장을 찍으면 하루가 평안 할 것 같고, QT를 하고 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은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내도록 교회에서 머물면, 하나님 품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자기 만족과 자기 열심이 아니라 생명력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 넘치고, 세상을 이길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피 묻음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혼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자유함과 평안이 함께 합니다. 어떠한 Program을 수료하고 나서 뿌듯해 하고, 하나님의 군사로 된 듯함 느낌이 든다면 착각일 수 있습니다. 경건의 훈련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사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음 속에 끊임없는 주님에 대한 목마름과 갈망입니다. 첫사랑에 대한 갈급한 심정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뜨거운 심정입니다. 예수 이름을 영으로 계속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몰라 줘도 괜찮습니다. 주님만 아시면 됩니다. 주님 이름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주님이 갈급해서 견딜 수 없다면…. 진정한 영혼의 목마름으로 주님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이 어떠한지 확인 해 보아야 합니다. 심령이 예수의 은혜로 젖어 있다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자신이 정한 범위의 분량을 했다는데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주의는 신앙의 Up and Down이 심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오직 하나님을 자유롭게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목말라서 견딜 수 없는 심정입니다.
둘째, 금욕주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또한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십자가를 져 주셔야만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십자가를 자기 마음대로 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벼워 보이는 것도 주님이 짐 져 주셔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도 주님께서 함께 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의 이름 때문에 구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서 세상의 모습이 싫어 질 수는 있습니다. 성령께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좋아했던 것들이 싫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치기 하실 때는 영혼 속에 있는 세상의 모습이 뽑히기 시작합니다. 이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만나는 것을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영혼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과 주님을 다 좋아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아직 주님을 못 만났거나, 초신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많은 중보기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 만나고서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만나는 것조차 자신의 영이 흐려 진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쇼핑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영혼의 영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멀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끊는다고 하면서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도들도, 제자들도… 어느 누구도 세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전도하셨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관습을 우습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인정할 부분을 수용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한 가운데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절제의 능력을 주셔서 세상적인 모습이 사라 질 수 있지만, 금욕주의를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금식하거나, 특별한 시간에만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죄악이 아니라면, 세상에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것들이 많습니다. 상당한 지혜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금욕주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에 섞이지 않는 상당한 절제와 분별이 필요하지만,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금욕주의는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 순교 지상주의 입니다. 모두가 선교사와 목회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땅끝까지 나갈 수 없습니다. 각자에게 주신 분량이 있습니다. 멀리 가기 전에… 바로 옆에, 주위에 영향을 미치는 삶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들어가면, 하나님 앞에서 평안하게 사는 삶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받은 은혜가 무척 큰데,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지 마음에 갈등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전하시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 또한 성령께서 감동 주시는대로 해야 합니다. 어떤 영혼은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땅 끌까지 나가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순교하는 삶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씀 같지만, 진정한 순교는 지금 현재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다른 영혼을 Touch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그러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넘치는 사람은 가정에서나 선교지에서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어느 곳에 가서 주님 이름으로 순교하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성령의 특별한 인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의와 생각으로만 간다면, 상당한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순교는 지금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품는 것이 순교자적 삶입니다. 도저히 중보기도 할 수 없는 영혼을 놓고 밤새 축복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순교자의 삶이라고 보실 것입니다. 현재 삶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어느 곳에 있던지, 순교자의 영성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보내시더라도 그 사명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명을 이루려고 하기 이전에 지금의 환경에서 먼저 순교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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