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JM 칼럼 - 왕이 되고 싶었던 왕의 아들 (110)]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삼하15:6)
기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뜨거운 기도가 있을때 일어납니다.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함께 기도하셔야 할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사모하는 심령을 허락하십니다. 기도의 열매는 평안입니다. 평안이 응답입니다. 기도 가운데 주시는 평안은 믿음의 눈을 열게 합니다. 폭풍가운데 서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잠잠히 계시지 않으십니다. 믿음대로 일하실것입니다. 믿음의 고백대로 이루어 질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가끔 의문이 생길때가 있습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형통할까?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까? 일이 안 되는 것이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요즈음 하는 일들마다 꼬이는데 기도의 자리로 나가면 이 모든 것이 풀릴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내 힘으로 살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내 생각과 의지, 감정, 그 어떠한 부분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지킬수 없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만 한다고 모든 것이 쉽게 형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조금 쌓는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지 않을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문제를 먼저 푸는 열쇠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져 오는 Key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생명력을 구하는 것이 기도와 간구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도록 성령께서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영역에 대해서 기도 가운데 영감이 생길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영역과 사람이 해야 할 영역에 대해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일이 어렵거나 꼬일때 기도의 자리에 나아 가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일의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신의 방법을 회개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되었던 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겠다는 영혼의 뜨거운 고백입니다. 당장은 눈앞에 응답과 열매가 보이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모래밭 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 기도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방법...하나님의 지혜와 비젼,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우게 되는 것이 무릎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가져 올수 있습니다. 큰 운도 따를수 있습니다. 하는 것 마다 형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도움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이 모든 것이 따라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위기가 왔을때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 갈수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축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축복 이전에 먼저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 가르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하나님의 음성...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먼저 가르치실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의 집안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없이 자신의 방법으로만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었지만, 다윗이 살아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압살롬입니다.
복중에서 기도를 먹고 자라난 아들이었지만, 하나님보다 세상적인 야망, 자신의 방법이 가득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중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흠이 없었던 사람은 압살롬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탁월한 인간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Leadership과 인간적인 수완, 재능을 두루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야망을 주체 하다 못해서 자신마저 불태워 버린 왕자였습니다. 어쩌면 조금 더 그 시간을 참고 인내 했더라면 자신에게 또 다른 기회가 왔을지 모릅니다. 압살롬의 형인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살해 당한후에도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야망이 가득한 나머지 나중에는 자신을 부추기는 사람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다윗은 피신가게 됩니다. 그 빈 자리를 압살롬이 차지하게 되고, 백주 대낮에 다윗의 후궁을 취하게 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자신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던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황급하게 도망가고, 압살롬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다 되는것 같았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부터 성문 길 곁에서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도와 줌으로 백성들의 민심을 몰래 도둑질하기도 했습니다. 다윗 모르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백성들의 온 마음을 모으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보통 탁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어떻게 이끄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과 노장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용맹과 용기도 있었습니다. 결단과 추진력, 비젼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탁월했던 압살롬을 가장 최정상의 시간에 무너뜨리셨습니다. 자신의 눈에 "이제 성공했구나, 이제 원하는 것을 취했구나" 하고 압살롬이 생각했던 그 시점에 하나님은 그를 치셨습니다.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올라 갈수 있는대로 올라갔습니다. 그것도 수년내에 자신의 계획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내버려 두시는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다윗과 신하들의 눈을 가려 주셔서 압살롬의 계략과 음모를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내버려 두실뿐만 아니라 압살롬을 돕는것 처럼 보였던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방법에 취했습니다. 자만과 야망으로 이글거렸습니다. 세상이 우습게 보였습니다. 아버지 다윗과 신하들까지도 만만하게 보였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다윗은 저항 한번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승리는 바로 눈 앞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겨둔 전리품들을 하나 하나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후궁들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남아 있던 신하들과 군사들을 정비해서 아버지 다윗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압살롬은 이 시간까지 천군만만를 얻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형통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방해와 저항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던 다윗은 오히려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눈물의 시간이었습니다. 맨발로 거친길을 가면서 도망가야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했던 신하와 군사들 또한 초라해 보였습니다. 사울 왕때문에 도망쳐야 했던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 때문에 또 도망가야 했습니다. 마음이 무너 졌습니다.
회개하고 영적으로 우둔해 진것을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마음을 찢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대세가 완전히 압살롬 쪽으로 넘어가서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는 시점에...하나님은 개입하셨습니다.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압살롬은 무모하리 만큼 다윗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없어야 자신의 온전한 왕이 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봉에 섰습니다. 다윗과 신복을 따라 잡았습니다. 그 순간, 노새를 타고 상수리 나무를 지나가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었던 압살롬...머리털이 남들보다 더 많아서 아름답게 보였던 그의 외모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상수리 나무에 머리가 걸려서 자신이 꼼짝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노새는 빠져 나가버리고, 자신은 나무에 대롱 대롱 매달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물에 든 새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결국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과 군사들의 손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일찍부터 나무가지에 매달려서...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의 어려움이 왔었더라면 진작부터 하나님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그물에 여러번
걸렸더라면 하나님을 부르짖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던 압살롬은 단 한번의 올무에 무너 졌습니다. 치열한
전쟁속에서 죽은것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머리털이 나무가지에 걸려서 너무 쉽게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 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최후는 허무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쓴 열매입니다.
야망과 욕심에 자신마저 불태우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압살롬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는 시간은 평안이 아닙니다. 교만으로 자신을 함정과 그물에 내모는 시간일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러한 위기의 시간에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아주 무너지지 않게 하십니다.
육신에 조금의 흠도 없었던 사람, 탁월한 Leadership, 전략, 계략... 타고난 달란트과 재능이 넘쳤던 압살롬이 어떻게 쉽게 질수 있었던 것일까요?
첫번째, 다윗의 무분별한 아들 사랑이 위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 13:39) 다윗은 아들의 잘못에 예민하지 않았습니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적으로 범할때도 노하기만 할뿐 아들에게 채찍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암논을 압살롬이 복수심으로 죽였을때 조차 오히려 압살롬을 더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로서 당연한것이겠지만, 분별력이 흐려질 정도로 어두워지는것이 문제였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러할때, 자녀 또한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영적 원칙을 잃게 됩니다. 부모로서 무분별한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 될때 자녀는 결국 부모를 우습게 알게 됩니다. 다윗의 무분별한 사랑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우상입니다. 다윗에게는 압살롬이 아들을 넘어서서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압살롬에게는 다윗의 채찍이 없었습니다.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 하는 상대가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고 방자하고 교만한 마음이 계속 싹트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리를 욕심내기 시작했습니다. 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압살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두번째, 아버지 다윗의 신앙이 계승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교회에서만 자녀들의 믿음과 신앙을 가르쳐 줄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목회자들과 교사들이 신앙을 이끌어 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수많은 시편과 삶을 통해서 영적인 원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발자취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없는 영적 생활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고 건져 내시는 손길을 보면서 많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신앙과 믿음이 전혀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찬양과 기도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절대 믿음과 순종의 믿음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들 암논과 압살놈은 그러한 모습의 전형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 다윗에게 책임이 있을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도록 이끌어 주는것보다 아들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에 빠져 있었기에 아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대가가 혹독했습니다. 많은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압살롬 또한 자신의 탐욕에 빠져서 결국은 온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아들에게 전수되지 않았던 쓴 열매가 너무 혹독했습니다. 압살롬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번째, 압살롬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조가 내려 가는 동안 아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칼을 들고 일어나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경우가 흔치 않았습니다. 영적인 모습은 반드시 육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모습이 아버지 다윗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다윗은 통곡하면서 요단강 앞으로 피신했습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서글펐을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 자신에게 칼을 들고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범죄했을때 하나님께서 이런 심정이시겠구나. 내가 하나님을 무시할때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시겠구나..." 수많은 감회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천륜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흘러 넘칩니다. 영적인 원리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지 못했던 다윗의 마음 중심은 결국 그 영적인 쓴뿌리인 불효로 마음이 찔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인생의 과정과 관계에 적용됩니다. 생령력이 모든 곳에서 흘러 넘치게 됩니다.
네번째, 압살롬은 죄책감을 못 느꼈습니다. 영적으로 찔리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을때, 기도 할때...영적으로 죄책감이 들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영적인 성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깨뜨리시는 과정입니다. 영적으로 석화된 사람은 죄책감에 대해서, 본인의 모습에 대해서 많이 둔감합니다. 알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강팍해 집니다.
자신의 누이인 다말을 위해서 암논에게 복수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대로 했습니다. 살인의 참극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다지 마음에 찔림이 없습니다. 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버지 다윗이 압살롬으로 인해 더 슬퍼 합니다. 다윗만 고통합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압살롬의 마음에 고통과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를 도와주었던 요압에게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칩니다. 영적인 둔감함은 강팍한 마음을 가져 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 가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단계입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마음이 고통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보호하시기 위해서 주신 영적 신경의 자극입니다. 압살롬은 완전히 마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형을 죽였던 압살롬은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까지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죄책감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회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다섯번째,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은 인생에서 자신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영혼을 배려하려면 영적으로 예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분노와 혈기를 잘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또, 귀가 얇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마음이 들지 않으면 참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다윗이 만나 주지 않자 견디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왕자의 지위를 회복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안달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서 요압의 밭에 불을 놓기도 합니다. 더 이상 참을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다윗과 화해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그가 원하는 것을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민심을 도둑질하기 시작합니다. 치밀합니다. 오랫동안 자신만을 위해서 준비한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더라면 다음 왕위에 앉았을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조급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며, 무엇을 준비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도 없습니다. 자신에 초점을 맞춘 사람의 해독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해독제가 없었습니다. 민심을 얻었던 압살롬은 결국 다윗에게 칼을 듭니다. 이 모든것들이 영적인 무감각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만이 주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여섯번째, 하나님 없는 인생은 큰 위기의 상황에 한순간에 쉽게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모르더라도 어느 정도 편안한 삶을 누릴수도, 부와 귀를 누릴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더라도 어려움이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간증과 노래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고, 인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개입하십니다. 압살롬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 주신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었지만,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왕이었기에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그런 영적 원리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한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 없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승승장구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탐욕과 야망때문에 결국 악수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압살롬의 지나친 욕심이 결국은 자신을 옭아 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최정상까지 올라 가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것 같습니다. 자신의 야망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서 우스개 거리로 만들어 버리실때가 많습니다. 인생의 가장 최정상에서 무너뜨리실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인생은 위기의 상황에 빠져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염려, 걱정을 이겨 낼수가 없습니다. 극한 상황을 바꿀수 없고, 이겨 낼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생도 얼마든지 넘어 질수도,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 진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결코 그물이나 함정에 들게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좌절과 낙망이 올수 있지만, 그 또한 더 좋게 선을 이루게 될것입니다. 압살롬은 이러한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육체에는 흠이 없었지만, 영적인 인생에는 큰 흠 투성이었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큰 위기의 상황에 너무 쉽게 무너 질수 있습니다. 왕이 되고자 했던 왕의 아들, 압살롬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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