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Weekly칼럼(101-150)

"나 자신"부터 문제입니다. (109)

Joseph Lee 목사 2013. 10. 31. 12:52

[LJM 칼럼 - "나 자신"부터 문제입니다. (109)]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부부의 무모한 행동과 실수로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보기도 합니다. 결과만 보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수 있을까 할 정도의 행동들을 보기도 합니다. 그 행동이 가정과 동료들과 교회에 큰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과정 중에서 아무리 설득하고 타일러 보지만, 무엇에 홀린듯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마비된듯이 말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가정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그러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경우 몇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번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귀를 막은듯 행동합니다. 옆에서는 답답합니다. 누구나 정답을 다 아는데 혼자만 괜찮다고 합니다. 자신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혈기와 역정을 잘 냅니다. 자신만 피해자인듯이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의 보상을 못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세번째, 거짓말이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임기응변으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거짓말의 영에 공격을 심하게 받는 경우는 자신이 거짓말하는것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를 속이는 것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네번째, 죄의식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마비가 오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죄책감이 없습니다. 마음에 찔리는거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가슴앓이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이러한 몇가지 모습은 중독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합니다. 도박이나 유흥으로 인해서 가정을 깨뜨리거나, 사기로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란 온 환경과 주변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또, 성인이 되기까지 성실하게 살더니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 된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 중에서 도박으로 무너지는 가정을 많이 봅니다. 어느날부터 성실하게만 살아온 남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일을 마치고 일찍 집에 들어 오던 사람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 집니다. 들어와서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늘 피곤하다고 합니다. 주말에는 없던 스케쥴이 계속 만들어 집니다. 평상시 같으면 휴식하면서 조용히 보내곤 했던 사람이...무슨 운동이다, 회사일이다 하면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습니다. 왜 전화 했느냐면서 역정을 냅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자녀에게는 관심도 없습니다. 모든것을 귀찮아 합니다. 그냥 일시적으로 그러려니 그러고 넘어 갑니다. 말해도 듣지 않으니 어떻게 할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 나중에 알게 됩니다. 은행에 잔고도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Credit Card도 Limit까지 다 사용했습니다. 집도 담보로 넘어 가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전화가 오는데, 자신의 친구에게서 까지 돈을 빌려 갔다는것알게됩니다.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로만 듣던, 드라마에서 보던 일들이 우리 가정에서 벌어 지다니...

 

또, 다른 경우의 예입니다. 착실하게 아내만 바라보고 살아가던 남편이었습니다. 집에 귀가 해서도 아내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말하기를 좋아하던 남자였습니다. 부엌으로 가면 부엌으로 와서 말을 겁니다. 때로는 귀찮기도 합니다. 잠시 외출해 있으면 어디 있냐고 그렇게 찾습니다. 귀찮은듯 하지만, 그래도 이 남자에게는 나 밖에 없구나 속으로 위로 하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 오는 길에 전화가 옵니다. 뭘 먹고 싶은지...필요한것은 없는지...물어 보곤 합니다. 절대로 빈손으로 들어 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랬던 남편이 출장이 잦아 집니다. 밖에서 약속이 자주 만들어 집니다. 타주로, 다른 도시로 가야 할 일이 늘어 납니다. 바쁘다고 합니다. 멋을 내지 않던 남편이 멋을 내기 시작합니다. 구겨진 옷을 편하게 입던 남편이 다려입으려고 하고, 향수도 뿌리기 시작합니다. 무엇인가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정확한것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집을 나가 버립니다. 다른 사람이 이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의 예를 주변에서도 많이 보다보니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아픕니다. 본인이 어떠한 피해를 가족들에게 끼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족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은 이루 말할수가 없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처절한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온다면 일을 저지런 사람의 책임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가족들과 함께 그 길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솔직했어야 했습니다.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막으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이런 저런 변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입니다. 그 변명을 넘어서 자신이 저지른 행동으로 가족들은 너무 큰 피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99% 당사자의 책임이 분명합니다. 아니 100% 본인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대화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가 외로울때가 많습니다. 정서적인 부분이 전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것을 하려고 했지, 상대방이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를때가 많았습니다. 집안일을 도와 주고,선물...기념일 챙겨 주는 것으로 서로가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말때문에 상처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남편이, 아내가 이런 저런 일로 상처 받았다면, 섬세한 Touch가 필요합니다. 말로 상처를 받았다면 반드시 말로 풀어야 합니다. 선물과 봉사로 되는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고 하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려지겠지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자신만의 생각일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곪아 있는데 시간만 지난다고 풀려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할 만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철저하게 미안해 하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끼리 쑥스럽게 그래야 합니까? 그런씩으로 가 버립니다. 시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모습이 이랬었고,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땠었는지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실수할수도, 혈기를 부릴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이해하게끔 대화로 풀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마음을 풀었으니 상대방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은 많은 경우 교만에서 시작합니다. 단순한 사람은 쉽게 풀수 있지만, 섬세한 사람은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10년, 20년 시간이 가도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느 순간, 뚱딴지 같이 말하고 행동할때 옆에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정신이 이상해 졌나 그렇게 생각하지만...마음 속에서는 오랫동안 곪아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마음에서 표현하지 않고 상해 있다 보니 생각 속에서는 끊임없이 고통 받아 왔던것입니다. 사탄에 덮여 씌운것이 아니라 고통 받아 왔던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그렇게 나올때가 많았던것입니다. 위의 극단적인 예도, 이러한 부분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와 정서의 단절... 많은 가정에서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쪽 편에서는 내가 지금 이렇게 노력하는데...내가 얼마나 잘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수 있을것입니다. 억울할수도 있고, 섭섭할수도 있을것입니다. 관계에서 회복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기도 조금 하고, 옆에서 어린 아이처럼 잠시 달래준다고...원하는것 몇개 한다고 결코 풀리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복원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수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서로가 그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몇가지 원하는것을 말하고 대화했다는 식의 말은 곤란 합니다. 세상 돌아가는것,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 하고 나서 우리는 대화를 많이 하는 부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정한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내놓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미안하다, 용서해달라" 는 말을 어렵지 않게 합니다. 그 시간을 구렁이 담넘듯이 지나가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깊이 미안해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이 전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합니다.

상대방이 대화를 피하려 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대화해도 못알아 듣는 사람이라는 마음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안되면, 글로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는 더 이상 나갈수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들어야 될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아무리 한쪽에서 잘해도 상대방이 어긋나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 주고, 맞춰 주려고 해도 감사한지 모르고 빗나가 버리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노력해야 합니다. 10년동안 무너진 신뢰라면, 그 관계가 회복 되는데는 5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갈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제 자신의 모습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을 책망하시기 전에 항상 "나 자신"에게서 문제를 먼저 해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야기 듣다가 흥분해서도 안됩니다.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또한,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아프면 아픈것입니다. 힘들다면 힘들어 하는것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아니면 그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을것입니다.

 

영적으로 마비 되어서 어느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분명이 있습니다.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두 사람 사이의 크고 작은 문제들, 대화와 정서적인 단절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생겨난 문제일수 있습니다.

자신이 영적인 환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많이 본다고 지금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안에 있는 영적으로 어긋난 부분부터 치유하길 원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 베드로의 모습으로 부터 배워야 할 모습이 있습니다.

 

첫번째, 항상 표현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6)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 관계에서 표현은 늘 중요합니다. 쑥스러워서, 익숙지 않아서...그렇게 못할수 있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깊이 알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백하는데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말로, 글로 고백하는게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말로 끊임 없이 교제를 나누는 관계였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께서도 그러한 고백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랑은 표현하기 전까지 사랑이 아닐수 있습니다. 단, 표현도 자신이 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난 그런것 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모를까?" 그런 표현을 하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곪아 있는 부분이 나오는것입니다. 그 곪아 있는 부분을 어루만져 주어야합니다. 이야기 하면 2-3시간이고 듣고 고치겠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내려 놓는 과정으로 귀하게 여기실것입니다.

 

두번째, 그러한 고백은 아름다운 역사를 가져 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사랑의 고백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는게 우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고백을 즐겁게 받으셨습니다.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그처럼 베드로의 고백이 주님을 움직였습니다. 그 고백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예수님께서 하늘의 권세를 베드로에게 허락하십니다. 결국 기도의 권세입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고백은 서로 상호적이었습니다. 일방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 부부간에도 상호간의 고백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것입니다. 정서적인 상호교감이 중요할것입니다.

 

세번째, 상처 줄수도, 실수 할수도 있다는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사랑의 고백을 할때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를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배드로는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어느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확신할수 없습니다.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실수할수도, 넘어 질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완전하고 흘러 넘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넘어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 일것입니다. 사랑은 감싸 안아 주는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잘해도, 내일 서운하게 할수 있는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고백을 했었던 베드로도 너무 쉽게 무너 졌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도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상처 줄수도, 실수 할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시간에 상대방의 모습을 받아 주고 기도하는 태도가 중요할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어제의 고백이 오늘의 실망스로운 모습으로 바뀔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기대 할 부분이 없는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것입니다.

 

네번째, 그 어떠한 경우에도 "나 자신"이 먼저 통곡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모습때문에 통곡하기 이전에 내 자신의 모습을 먼저 통곡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저렇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일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달라졌으니, 상대방도 지금 바뀌어야 하는것은 교만입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든지 넘어 질수 있습니다. 강팍해 질수도, 실수 할수도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방에게 대한 이런 저런 넋두리를 많이 하게 됩니다. 제 3자에게 마음을 털어 놓을수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위로 받는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로 가서는 자신의 모습을 먼저 통곡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것이 바로 나 자신일수 있습니다. 원래 그러지 않던 사람이 그렇게 강팍하게 변했다면 나 자신의 책임일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appeal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충고와 권면도 중요하지만, 때와 장소가 있을것입니다.

자신이 통곡할때 하나님이 귀기울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대방을 고치시지 이전에 나 자신을 먼저 만지시길 원하십니다. 항상 나부터 입니다. 통곡이 회개입니다. "나부터 고쳐 주세요" 하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이 이 부분을 만져 주시지 않으면 살수 없어요" 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기도는 회개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기도를 마칠때 쯤에는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고 아파했는지 주님께서 보여 주실것입니다. 진정한 기도의 열매는 상대방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회개로 연결되는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동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통곡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용서를 가져 오고, 결국 초대교회의 Leader로 다시 세움 받는 계기가 되어집니다. 초대 교회는 베드로의 통곡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섯번째, 통곡할때 하나님은 더 큰일을 맡기십니다. 새롭게 하실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때, 그는 통곡으로 엎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너무 기쁘고 좋았지만, 쉽게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한번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 회개할때 하나님의 비젼이 열리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일을 맡기실것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상대방이 돌이킬때 계속해서 기회를 주어야 할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뭐라고 해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지만, 죄인의 낮은 심정이 하나님앞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합니다. 내가 통곡할때 하나님은 상대방의 마음을 만져 주실것입니다. 가정을 새롭게 하실것입니다.

 

여섯번째, 내 자아가 죽으면 성령께서 하실것입니다. 연약한 베드로는 혈기와 나약함으로 자주 넘어졌습니다.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것 같았던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한 임재속에서 큰 변화를 경험합니다. 말과 행동이 완전하게 달라졌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내주하시면서 베드로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할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을때 사람은 변화됩니다. 내가 하려고 할때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을때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이 하나님을 움직였습니다. 그의 회개속에서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고, 성령의 임재가 그의 삶과 인격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은 오직 성령밖에 없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