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호세아는 없다. (63)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 하실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호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호3:1)
PS) my-jc@hanmail.net으로 이메일이 안되시는 분은 josephlee0212@gmail.com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약한 순간에 하나님을 찾는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자신의 강점으로 일하거나, 일이 잘 진행될때는 무릎 꿇기 힘들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일이 잘되든지 안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할뿐이다.
하나님은 내 일을 위해서 사용할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다. 인생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람은 일의 성공과 진행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만 구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점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해서 엎드리는것이
아니라 나같이 약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에 가슴 저리게 되는것이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큰
성공을 주시고, 남들에게 없는 귀한 달란트를 주셨을때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은 십자가 뒤에 감추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을때가 오히려 가장 두려운 시간일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주위에 그렇게 큰 문제가 없고, 이 정도의 인생이면 괜찮겠지
하며 스스로 만족할때가 무릎 기도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다.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생각할때는 영적인 감각이
이미 둔해진 시간이다. 세상의 영에 대해서 어떠한 반감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도 무감각할것이다.
인생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항상 함께 존재한다. 오르막 길로 힘들게 올라가서 정상이다 싶으면 아주 급한 속도로 내리막 길을 달리게 된다. 정신 없을 정도로 내려가기도 한다. 다시 절망 속에 허덕이다가 주님이 일으켜 주셔서 어렵게 올라가다 보면 이전 정상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게 되기도 한다. 정상에 올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수 있다. 그 정상에서 마음을 지키는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정상에서 인생의 내리막 길에서 가졌던 겸손하고 깨어진 마음을 계속 유지 할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온유하며 겸손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될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강점으로만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릎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남들에게 없는 약한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축복의 근원이 될수 있다. 그러한 약점이 하나님과 제대로 된 Plug in이 된다면 강력한 축복과 은헤의 통로가 될수 있을것이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40년 전, 여로보암 2세때가 나라가 가장 흥황했던 시기였다. 부가 넘쳤고, 나라의 힘이 가장 강했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풍요로왔기에 하나님을 찾기 보다 자신에게 복을 주는 우상을 찾았고, 물질을 의지 했고, 자신의 손을 더 믿었다. 하나님과는 최악의 관계였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주셨다. 아모스, 호세아, 요나. 이 세명의 선지자가 이 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세상의 축복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민족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소원하셨다. 그리고, 기회를 주셨다. 기다리셨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육적인 축복을 누리는것이 아니라 취해 버렸다. 너무 깊이 취했기에 바로 앞을 보지 못했다. 항상 지금 이대로...이대로만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모두가 자아 도취에 빠져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 칼을 갈고 계셨다. 앗수르를 일으키셨고, 하나님의 칼이 되게 하셨다.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여로보암 2세의 북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픈 심정이 누구보다도 호세아를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었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하나님의 사람. 호세아의 부정한 아내, 고멜을 통해서 북이스라엘의 타락을 말씀 하셨던 하나님. 그 아내의 모든 허물을 감싸 안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했던 호세아. 모든 부정을 찢어진 마음으로 다시 품어 주어야 했던 호세아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호세아에게, 호세아의 마음이 고멜에게 전해 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인내속에서 베풀어 주셨던 수많은 기회속에서 끝없이 누릴것만 같았던 이스라엘의 흥황기가 불과 40년만에 끝나 버렸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가운데 다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현재 손에 쥐어 주시는 육적인 축복 속에서 수많은 영적인 경고와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 모른다.
육적인 흥왕 자체가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육적인 축복처럼 보이는 축복들과 함께 호세아의 마음이 함께 주어지지 않는다면 불과 몇년안에 사라질수 있는 신기루인지도 모를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손에 쥐어질 어떤 축복보다 하나님만을 소망하는것이 답일것이다. 그리고, 호세아의 마음을 가질수 있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쉽게 받을수 없는 영적인 축복을 이미 받은 사람일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멜과 같은 영혼을 감싸 안을수 있는 넓은 마음을 받고 싶어서 하나님앞에서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할수 있을까? 나 또한 어떤 축복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앞에서 찢어진 호세아의 마음을 갈망하며 소원할까? 이러한 기도가 내 기도 제목 속에서 얼마나 많은 분량을 차지할까?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우뚝 설수 있는 탁월한 사람을 찾으시기 보다는 한 명의 부정하고 타락한 영혼을 안을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실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할때가 많다. 호세아 선지자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데려 오라고 말씀하시고, 호세아는 그대로 순종한다. 참 쉽지 않은 부분이다. 호세아가 그러한 순종의 그릇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요구 하셨을것이다.
하나님은 은혜가 떨어질때,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시고, 보내신다. 이 시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호세아를 세우셨고,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 주고 싶으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 아내 고멜에 대한 이야기다.
나라 전체가 영적으로 음란하듯이, 그러한 영육간에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취하라고 말씀하셨다. 한 남자로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호세아는 온전하게 순종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스르엘, 딸 로루하마, 아들 로암미 라는 자녀를 허락하셨다. 그 자녀의 이름 모두...마음 아프게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하나님의 분노,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녀의 이름대로 불과 40년 만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자녀들의 이름을 부를때 마다 호세아는 마음이 아팠을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조롱도 있었을것이다. "나라가 이렇게 부유하고, 잘 사는데...나라가 힘도 있는데...이스라엘이 멸망할거라고?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거라고? 무너져서 결코 일어나지 못할거라고?" "참...별 사람도 다 있지. 모두가 풍요롭게 사는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받은 축복인데...나라가 없어 질것 같으면 이러한 육적인 축복을 허락하지 않으시지...호세아의 눈에는 이런 축복이 안 보이나? 본인이 제대로 누리지 못하니깐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질투하고 말이야..."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을것이다.
사역자이기 전에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이들의 아빠로서 행복하고 싶었을것이다. 하지만, 호세아에게는 정숙하고 내조를 잘하는 여인보다는 부정하고, 자기 정욕밖에 모르는 여인을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아무에게나 쉽게 요구하시는 부분이 아니다. 호세아와 같은 그릇에게만 요구하시는 부분일것이다. 남편으로서 그 여인을 온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고멜은 아니었다. 또 다른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로서 모든것을 다 잃어 버리고, 하늘이 무너 지는 느낌이었겠지만, 호세아는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아서 음녀가 된 고멜을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데리고 온다. 그리고, 고백한다. "앞으로 많은 날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라."
하나님께서 용서와 사랑의 능력을 주셨기에, 호세아가 그렇게 할수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데려 왔을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했다. 그렇게 타락했던 북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호세아가 그 아내 고멜을 사랑했던것 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사랑을 보여 주고 싶으셨다. 호세아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었다. 돌아 오는것은 조롱과 핍박과 비웃음이었을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이러한 과정을 반드시 지나간다. 아무도 이해못하는, 이해 할수 없는 시간이 반드시 있다. 그 시간 최선을 다하지만, 돌아오는것은 아픔과 고통밖에 없는 그런 시간이 반드시 있다.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길이다.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가 올라가신 십자가의 길이기에 그렇다.
어떤 젊은 커플의 이야기다. 한 20대 후반의 형제가 어떤 자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는데, 그 자매는 하나님을 믿은지 이제 불과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막 믿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었다.
그 자매에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과거가 있었는데, 요정과 술집에서 일했던 어두운 시간이 기억속에 남아 있었다.
처음부터 그 형제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이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마음의 깊은 찔림이 있게 되었고, 어느 날 어렵게 그 형제에게 모든것을 말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형제는 무척 갈등과 혼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기도하고, 기도했지만, 그 자신의 마음이 쉽게 평안하지 못했다. 한 동안 기도후에, 어느날 가까운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하게 되었다.
"목사님. 호세아가 고멜을 감싸안듯이, 그가 고멜과 함께 가정을 이루었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호세아가 되어서 고멜과 같은 자매를 아내로 맞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 고통가운데 있었지만, 어렵게 결정했습니다. 그 결심을 목사님께 가장 먼저 말씀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고, 이야기만 듣던 목사님께서 갑자기 큰 목소리로 책망을 하셨다.
"자네가 호세아이고 그 자매가 고멜이라고? 자네. 정말 큰 착각에 빠져 있구나.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고멜이고, 그 자매가 호세아 같은데... 자네 스스로 그렇게 거룩하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과거의 어떤 삶을 살았든지 상관없이 지금 그녀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주의 신부가 되었고, 이 순간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 자매인데...하나님 보시기에 그 자매는 고멜이 아닌 호세아로 느껴지는 귀한 주님의 딸이야. 오히려 자네보다 믿음도 순전하고, 더 순수해. 훨씬 깨끗하고..."
가까운 목사님을 찾아 뵙고, 어려운 결심을 말씀 드렸는데 꾸중과 책망만 받고 돌아 왔다.
오는 길에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그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중에 깨달았다. 그 목사님께서 하신 영적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나중에 의인이 죄인을 건져 준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라는것을. 자신에게는 그 어떤 영혼을 구원할수 있는 구원자의 자격이 없다는 말씀임을.
그 자매를 고멜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을때, 시간이 흘러서 감정이 무디어져서, 그 형제 자신이 자매를 구원하고 건져 주었다고 착각할까봐, 그러한 선입견으로 자매와의 관계가 어긋날까봐, 자매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의인인양 자꾸만 가르치려고 할까봐...목사님께서는 깊은 생각과 통찰력으로 그 형제에게 말씀하셨던것이었다.
호세아는 그 아내 고멜을 데려와서도 구원자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을뿐이었다. 그 아내의 과거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아내를 구원한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호세아의 그릇의 분량이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용서와 나쁜 기억과의 단절이었다.
그 형제도, 우리도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그 형제도 결혼전에는 뜨거운 감정에 그런 고백을 쉽게 할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흘러서 감정이 좀 식다 시피 할때는 괜히 손해 보는것 같고, 억울한 마음도 가질수 있을것이다. 사람은 다 그렇다. 똑같다. 손해 보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 속에 늘 계산을 한다. 어느것이 가장 유익한 선택일까?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의 계산이 먼저일때가 많다. 어느날 성령께서 만져 주실때 기쁨으로 순종하는것 같다가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억울할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 변덕 스러운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호세아는 큰 그릇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는 사람을 더 기뻐할실것이다.
다른 남자의 품에 있는 아내를 데리러 가는 기분. 다른 남자와 있었던 과거 일들에 대한 상상. 돌아와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전처럼 사랑할수 있을까? 갈등. 배신감. 분노. 여러가지 아픔과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호세아 그 자신을 괴롭혔을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릇이지만, 호세아 스스로도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기도와 훈련의 시간을 가지면서 갈등속에 가지게 된 마음이었을것이다. 북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고멜을 향한 마음도 같았을것이다. 하나님을 닮고 싶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찢긴 마음으로 통곡하며 엎드려보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어떠한지 잘 알기에 호세아는 그 자신이 고멜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을때도 견딜수 있었을것이다.
안타깝게도 내 안에 호세아는 없다. 오직 고멜만 있을뿐이다. 수없이 반복되며 넘어지는 고멜의 삶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호세아와 같은 역할을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에 난 오늘도 주님앞에 돌아 올수 있는것이다.
난 고멜을 품을 만한 사랑의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사실 때만 가능할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마찬가지 일것이다. 우리는 더럽다고 생각하는것을 절대로 품을수가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난 고멜중의 고멜이었다. 난 호세아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없이 호세아가 될수 없다. 난 단지 고멜일뿐이다. 그리고 상처받은 고멜에서 치유받은 고멜로 옮겨 가고 있을 뿐이다.
치유받은 고멜로서 한 영혼을 어루 만질수만 있다면,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릴수 있다면, 진정한 호세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춤을 추시며 기뻐하실것이다.
'2010 Weekly칼럼(51-1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그 하나님의 방법 (65) (0) | 2013.10.31 |
---|---|
하나님이 더 급하시다. (64) (0) | 2013.10.31 |
하나님의 사람은... (62) (0) | 2013.10.31 |
기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 (61) (0) | 2013.10.31 |
영적 위기 관리 능력 (60) (0) | 2013.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