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116)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세상을 누리다가 마지막 인생의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받고 잠깐 동안 뜨겁게 신앙 생활하다가 하나님 품에 가는 그러한 사람을 부러워 하기도 합니다. 그 생각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세상적으로 손해를 많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항상 뜨거운 풀무불 속에 집어 넣으시는것만 관심있으신것 같고, 처절한 연단의 시간만 허락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 세상이라는 곳이 축복을 누리는 곳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항상 쳐서 죽도록 복종해야 하는 그러한 영적으로 치열한 숨막히는 전쟁터라는 인식이 우리 마음에 스며 들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틀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풍요로운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 풍성함을 누리시기를 누구보다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떠한 시간에는 연단과 훈련이 분명히 있지만...그 시간을 주님과 함께 잘 통과하고 나서는 영육간의 새로운 지경이 열려 지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도,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손의 못자국이 영화롭게 되었던 부활의 시간도 함께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축복이 있기 전에 므나셋의 축복이 먼저 옵니다. 십자가는 무조건적인 금욕과 슬픔, 기계적인 자기 절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단절을 말하지 않습니다. 수도원적인 생활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경우에 그럴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다 끊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요구하시는것이 다 다르겠지만...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가득 채워져서 그 어떠한 세상적인 축복의 환경이 주어 진다고 할지라도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낼수 있다면 형통함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을수 있을것입니다. 절제의 수준도, 누리는 수준도 사람마다 요구하시는 것이 다 다를것입니다. 진정한 십자가는 하나님이 지고 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지고 싶다고 지고, 안 지고 싶다고 그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도 하나님이 통과하게 하십니다. 원든 원치 않든 하나님께서 이 길을 각자 걷게 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시간 뒤에는 형통한 시간도 허락하십니다. 진정한 십자가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풀어 지는 시간이 왔을때 그 어떠한 환경에서도...기쁠때나 슬플때나, 어려울때나 형통할때나 온전하게 주님 모습...주님 형상을 따라가도록 다듬어 져 나갑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넘어져도 빨리 일어납니다. 쓰러져도 빨리 돌이킵니다. 십자가의 훈련은 빨리 일어나서 다시 주님께 달려 가도록 합니다.
자기 힘으로 인위적으로 십자가를 지려고 할때는 화가 날때가 있습니다. 분노하게 됩니다. 자신만 가로 막혀 있고, 다른 사람은 다 누리는 것 처럼 보이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의, 자기 열심, 수도원적인 삶, 영적 수퍼맨 신드롬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볼수 있습니다. 세상을 대할때 상당히 비관적인 모습을 많이 보입니다. 세상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늘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숨막힙니다.
강팍합니다. 모든 것이 비판의 대상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틀렸다는 것이 주요한 주제입니다. 자신만 제대로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듭니다. 순교자적인 신드롬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제대로 된 십자가를 지고 가는지 판단하려고 합니다. 잘못된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다고 정죄만 하려고 합니다. 논쟁과 비판이 주된 대화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함께 지시는 십자가는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영육간의 부활, 곧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새 일에 대해서 희망과 소망을 함께 가지게 하십니다. 영적인 영생을 이 땅에서도 함께 누리면서 육적으로도 하나님께서 하실 비젼과 Calling에 대해서도 기대하게 됩니다. 힘들어서 지금 이 시간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지만...소망과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자유합니다.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자기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는 영혼을 보더라도 여유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풍성합니다. 긍정적입니다. 세상을 보더라도 대적하고 멸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안에서 자기 자신을 늘 쳐서 순종하려고 하지만, 세상의 영혼을 뜨거운 마음으로 품으려고 합니다. 넉넉한 마음이 있습니다. 인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자 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 짐을 다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밖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삽니다. 이 세상이라는 곳이 너무 큰 자극이 될수 있기에 우리도 모르게 수시로 주님을 등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게 하시기에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그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때로는 너무 거친 시간이 되어서 고통받기도 하지만, 영적인 기쁨이 함께 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짐져 주시기에 우리는 그 십자가의 길을 걸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수 있습니다.
때로는 무엇을 절제하고 싶은 감동이 올때가 있습니다. 그동안 안되었던 것을 이제는 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수없이 고쳐 보려던 자신의 습관, 안 좋은 모습들...무수히 노력하다가 실패 했던 것들을 이제 다시 기도 해 봐야겠다는 깊은 감동이 마음 속에서 생길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도전하시고 만져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동안 너무 큰 산처럼 느껴지던 것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죽을때까지 안될거라고...못 고칠거라고 생각했던것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짊어 지고 가는 짐들도 그렇습니다. 기도하면서...이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세상 안에서 끌려 가기만 하던 모습들이 제어되기 시작하고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또한 성령께서 일하시기에 가능합니다.
자신의 자아가...우리에게는 큰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대적할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자아가 세상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어서 발버둥 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일하실때...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약한 부분들을 제어하고 이겨나가기 시작합니다. 피묻은 예수의 영이 직접 자아의 십자가를 짐져 주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예수의 영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의 우리를 죽이시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이 비록 성령에 의해서 이끌려 진다고 할지라도 아플수 밖에 없습니다. 힘든 영적인 화학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늘 마음을 찢어야 하고, 자신의 자아와 죄악에 대해서 슬퍼하기만 해야 하는것 같습니다. 자아에 대해서 통곡할때는 신앙 생활을 잘 하는것 같고, 펑펑 울면서 기도를 깊이 할때는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냉냉할때는 영적으로 뭔가 잘못되어져 가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뜨거운 은혜로운 생활을 누리는것도, 냉냉함 속에서 주님을 갈구하는 모습...모두 필요합니다. 그러한 Up and down속에서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될것입니다.
또한, 죽이기만 하는 십자가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을 풀어 주고, 지경을 넓혀 주시는 부활과 형통의 시간도 반드시 있습니다. 진정한 형통의 시간이 주어지더라도...자신을 제어하게 될것입니다. 그 무엇을 누리게 될지라도 흐트러 지지 않을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가끔은 영적인 회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손해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세상적으로 많은 부분들을 희생하는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것을 늘 내려 놓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분을 나눠 주는것 같은데...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많은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데...기도하지 않더라도 무릎 꿇는 사람보다 더 쉽게 일들이 풀려 지는것 같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부르짖는데 세상사람들은 그러한 힘든 과정없이...모든 것이 쉽게, 순탄하게 나가는것 같습니다.
이럴때 영적인 피해의식을 느낄수 있습니다. 영적인 좌절감 또한 있습니다. 꼭 기복적인것과 세상적인 축복을 구하지 않더라도...육신의 몸을 덧입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세상적으로 더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세상적인 형통한 사람들을 볼때 마음 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좌절감이 들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운명이 있는 것일까? 사람마다 가야 할 길이 정해 져서...그 길로만 기계적으로 따라 가야 하는것일까? 아무리 기도하고 두드려도...안되는건 안되는것일까?"
아직은 끝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한 순간 입니다. 순간적으로 인생 역전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세상적으로 더 형통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위기의 상황이 몇번 올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 없이 이겨 나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위기는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만...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진 않을 것입니다. 모두의 자유의지가 하나님께 마음이 열려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형통한것도 무너질 때는 한 순간입니다. 정상에서 무너지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격했던 사람의 이러한 내리막길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했기에...그만큼 비참할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찾는다면...그 위기의 상황에서 건져 질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영생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생의 수많은 위기에서 하나님의 안아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보호하시고, 웅덩이에서 건져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다시 회복시키시고, 영육간에 부흥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영적인 축복 뿐만이 아닙니다. 육적인 축복도 순서대로...하나님의 시간에 의해서 주어 지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묶어 두실때는 모든것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다 흩어 지는것 같습니다.
홀로 남는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푸실때는 다 보상하십니다. 신원하십니다. 새롭게 하십니다. 비상하게 하십니다.
진정한 부활의 축복을 누릴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 본 사람입니다.
마음을 찢고 통곡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자아 때문에, 환경 때문에...사람들 때문에...질병 때문에...울다가 쓰러져 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형통의 시간에는 다시 채워 지게 될것입니다. 다시 회복되어 지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로 결코 손해 보게 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때문에 참고, 십자기의 길로 들어서기를 결단한 사람에게는 비록 그 열매가 영육간에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하나님의 시간에는 반드시 보상하십니다.
낮추신만큼 높이십니다. 하나님께 눈물로 심은 만큼 웃으면서 그 단을 거두게 하십니다. 주님 이름때문에 참고 견딘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영육간의 영광과 영화는 참으로 클것입니다. 쉽게 결단하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이러다가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아닌지...이러다가 어리석게 무너 지는것은 아닌지...때로는 순종이 그렇게 보일수 있습니다. 양보하고 손해 보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계산하고 계십니다. 아주 무너 지지 않을 것입니다. 순종에 대한 대가는 참 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모습이 때로는 손해처럼 보일때가 많습니다. 어리석은 결정을 한것처럼 느껴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큰 그림을 보면 그 답이 보일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대가족 70여명이 애굽으로 들어간지 40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2-300만 정도 인구가 될 정도로 큰 민족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서 출애굽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민족이 만들어 질수 있었지만, 출애굽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서 처절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천대 받는것도 힘든데 노예로서의 삶은 고달파 보였습니다. 선민 백성...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약속은 있었지만, 현실은 채찍과 힘든 노예살이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선진 문명과 문화가 부럽고...동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개입하시지도 않는것 같았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애굽의 신...바알신이 더 강해 보였고, 그 신이 오히려 더 풍성하게 하고 풍족하게 하는것은 아닌가 마음에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갈등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가난하고, 어렵고...힘들기만 하고, 맘몬신과 바알신을 따르는 세상사람들은 풍족하게 누리는것 같기에...보이는 현실에서 오는 갈등은 있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은 풍족하고 풍성하게 만드셨습니다. 시간의 순서대로 세우셨습니다.
첫번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속에 섞여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노예살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로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난도 핍박도 있었지만...출애굽 하기 전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도록 부르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풍성하게 주셨더라면 이스라엘은 애굽 속으로 동화될수 있었습니다. 출애굽에 관심이 없을수 있습니다. 그 땅에 만족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선진 문화와 문명에 취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누리게 허락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막으실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호와 훈련이 주 목적이십니다. 결국은 비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십니다.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노예였지만...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그 땅을 차지하고 누리는 큰 축복도 허락하셨습니다. 다 갚아 주십니다. 풍성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두번째, 절대 빈손으로 나오게 하시지 않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이방인으로써, 노예로써 사는 동안 가난에 찌드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출애굽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애굽땅에 크게 나타내셨습니다. 유월절을 보내고 나서 애굽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들 수중에는 아무런 재산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재앙...장자를 치는 재앙 후에 오히려 애굽 사람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금은보화...물질에 대한 도움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큰 감동을 주십니다. 재앙으로 치셨는데...애굽 사람들은 지갑과 금고를 열어서 풍족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채워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방법으로는 꿈도 꿀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당신의 백성을 잠시 노예로 묶어 두셨지만, 푸실때는 결코 빈손으로 나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풍성하고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렴과 정직을 강조하시지만...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고난뒤에는 영육간에 넘치도록 채우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풍성하게 채우셨습니다.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번째, 시간이 가면서 더 풍족하게 하셨습니다. 광야 생활을 할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생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자신이 필요한것을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공급받아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광야에서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였을것 같지만...광야 생활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머물던 가데스 바네아에서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가축들도 있었지만,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방 족속...우상을 섬기는 민족들과 전쟁을 통해서 전리품을 계속해서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아직 차지 하지 않았지만,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그 땅을 차지할 자녀들이 점점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서 키워질 소와 양떼들을 전리품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셨습니다. 광야 생활은 척박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대로 계속해서 공급하고 계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걸어 올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리품으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가축들이 많아 졌습니다. 광야는 영적인 훈련의 학교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해서 공급하셨습니다. 나중을 위해서 입니다. 앞서 나가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필요한 종자들을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광야학교는 척박한것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풍성한 은혜도 넘칩니다. 비록 완전한 정착은 아니었지만...시간이 가면서 하나님은 더 풍족하게 만드셨습니다. 손해보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네번째, 시간이 되면 세우지 않는 성읍도 받게 하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 많은 부분을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인색하면 하나님도 인색하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과 백성들을 대할때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가 보일때가 많습니다. 시간도, 정성도, 물질도, 사랑도, 섬김도, 기도도....심을수 있는 들은 심어야 합니다. 뿌린대로 거두게 될 입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텅텅 비어 있는 땅이 아니라 그 땅의 일곱 족속들과 정복 전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생각에는 주실것 같으면 온전한것을 주시지...왜 힘들게 전쟁을 해야 하나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족속들이 곳곳에 세운 성과 성읍, 마을, 집...기업들을 고스란히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세우지 않는 집과 성읍...농사짓지도 않았던 밭들과 농장들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힘든 정복전쟁처럼 느껴질수 있지만...이들 족속들의 수고의 열매가 고스란히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하십니다. 어떠한 사람에게 감동을 주셔서 이유없이 돕도록 하게 하실때가 있습니다. 시작할 종자돈도 없는데 돕는 사람을 붙이셔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시작하게 하십니다. 어떤 규모의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전혀 시도 조차 할수 없는데...하나님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도움의 환경을 만드셔서 일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하나님만으로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육적인 모든 문제에서도 개입하고 계십니다. 시간이 되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성읍을 손에 쥐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던 축복이었습니다.
부르짖되, 끝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구하되 생명걸고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계산적으로 하나님을 찾는것이 아니라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구해야 할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예배가 가장 최우선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그 생명건 부르짖음의 끝에서 영육간의 전리품을 함께 얻게 될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비록 불순종할때도 많았지만...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는 더 크고 넘쳤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손해 보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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