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JM 칼럼 - 그럴지라도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105)]
여러가지 고난중에서 사람때문에 겪는 어려움처럼 힘든것은 없습니다. 건강의 어려움도, 물질 문제도...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겠지만, 가까운 사람때문에 또는,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때문에 오해와 아픔, 시련을 겪게 될때의 그 아픔은 겪어 본 사람들만이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훈련중 사람 훈련은 꼭 시키실것입니다. 그 어떠한 사람도... 가족.부모와 친구들 조차도 위기의 상황에서 큰 도움이 안된다는 영적인 원리를 반드시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수 없다는것을...사람들은 옆에서 도와 주고 싶어도 도와 줄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게 될때, 결국은 실망할수 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 모습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훈련을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때문에 억울해 하기도 아프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 상처를 주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많은 영적인 원리를 깨닫게 될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람을 결코 변화 시킬수 없습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고난도 힘들지만,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적 유혹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걸어가게하는 많은 요소들이 사람들과의 세상적인 교제를 통해서 올수도 있습니다. 지금 누구를 만나며, 누가 옆에 있느냐하는것은 중요한 영적 Point가 될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귀한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따라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훈련과 연단을 거치게 되며, 그러한 시험을 통해서 정금같이 하나님앞에서 사용되게 됩니다. 성경에 훈련없이 일어 섰을때 얼마나 쉽게 무너 질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삼손, 사울왕,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으로 부터 타고난 달란트가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범했었고, 영향력도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요소보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결국 무너지게 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시련을 통한 훈련이 없었습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영적으로 이끌어 주고, 생명력있는 교제를 나눌수 있는 인물들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옆에 두고 싶었던 사람들을 옆에 두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자신의 입맛대로 만났습니다. Brake가 없었습니다. 육적인 달란트가 자신의 욕심.정욕과 뒤범벅되어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채 무너졌습니다. 절제 없는 달란트.은사의 최종적인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옆에서 자신의 모습을 붙잡아 주며, 권면 해 줄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일것입니다. 영혼의 방파제가 될뿐만 아니라 하나님앞에 나아갈수 있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 줄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때문에 힘들수도 있겠지만, 축복된 좋은 만남은 영혼을 살리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축복된 만남이 있다면 그 인생은 귀하게 사용될것입니다.
사사기의 삼손을 묵상할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태어 날때부터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힘을 하나님 앞에서 받았지만, 자신의 인생은 비참하게 마무리되고 맙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크고 귀하게 사용될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지만, 적(enemy)은 항상 자신의 안에 있다는 것을 삼손을 통해서 또 배우게 됩니다. 그 당시, 40년 동안 블레셋으로 부터 압제를 당할때 하나님은 삼손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언약의 백성을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로 삼손을 세우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의 사명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영적으로 늘 위태하게 만들었습니다. 틈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한 삼손의 인생의 결말을 생각할때마다 인생의 매순간을 정말 조심하면서,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첫번째, 결국은 삶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망각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특별한 사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모두가 목회자이며, 선교사의 길을 걸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신 특별한 계획과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는것이 중요할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과 진로.장래에 대한 문제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한 사명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중보 기도자, 하나님의 정결한 자녀...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느냐(Doing)보다 하나님앞에 어떤 존재가 되느냐(Being)를 더 중요하게 여기실때가 많습니다. 결국은 삶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으로의 본분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성결한 삶....사명자가 사명을 잃어 버리게 될때 머리털이 깍인 삼손이 되었습니다. 두 눈이 뽑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니다. 하나님앞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오늘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태도, 그리고 매일의 거룩한 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술로만의 신앙일때 삼손의 마지막 종착지에 우리도 함께 앉아 있을수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앞에서 돌이키는 삶의 중요성을 깊이 새기게 됩니다.
두번째, 사랑할수록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삼손을 낳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아들을 주실것이며, 그 아들이 어떠한 일을 행할것인지 분명한 음성과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노아 내외는 아들에게 끌려 다녔습니다. 삼손은 이방 여인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힘이 넘치는 만큼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다녔습니다. 삼손은 그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조차 안했던것 같습니다. 이방인과의 교류가 자신에게 영적으로 얼마나 치명적이며, 어떠한 안 좋은 영향을 미칠지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삼손의 부모 조차도 한 두번 책망하다가 더 이상 말리지 않았습니다. 삼손의 이러한 모습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 부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삼손의 부탁을 받고 마음에 둔 이방 여인인 딤나 여자를 보러 내려갑니다.
삼손을 제어해줄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는 오히려 끌려 다녔습니다. 삼손은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으면 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딤나 여인에 대한 흠모하는 마음이 나중에는 들릴라에게 까지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모두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모습, 세상적인 가치관.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삼손은 자신의 사명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 중요한 역할을 삼손의 부모가 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채찍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끌려 다니고, 성인이 된 삼손의 가치관이 흔들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번째, 능력이 큰만큼 공격이 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달란트와 영육간의 은사를 구합니다. 크면 클수록 귀하게 사용될것 같습니다.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나을것입니다. 은사와 능력의 종류도 많을것입니다. 영적인 은사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은사와 능력을 기름 부어 주셔야 할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면 부어 줄수록 마귀 또한 극심하게 공격할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능력과 은사가 하나님께 제대로 사용되어 진다면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것이며, 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중요한 Key가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마귀가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Guideline대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방해 합니다. 무너 뜨리려고 합니다. 주변에서 이러한 예를 쉽게 찾아 볼수 있습니다. 환란과 고난때 보다 축복받았을때 영적으로 쉽게 변질되고, 더 쉽게 무너 지는것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것도 중요하지만, 그 도구가 되는 영혼이 변질되지 않도록, 그 어떠한 공격에서도 자신을 잘 다스릴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많이 부어 주시면 주실수록 사탄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것입니다. 틈새를 놓지 않으려고 치밀하게 계획할것입니다.
네번째, 삼손은 생각의 중심을 장악당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삼손은 큰 힘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블레셋을 쳐 부셔 버렸습니다. 1000명의 블레셋 군사를 혼자 힘으로 감당할수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으면서 블레셋에게는 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이겨 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떠한 군대가 오더라도 삼손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삼손의 생각과 마음을 장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진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유혹과 이방 여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이 유혹속에서 행동으로 옮겨 지기 시작하고, 점점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의 싸움후에 목이 마를때 하나님을 부르짖습니다. 싸울때는 자신의 힘을 믿고 의지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순간도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영적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두 눈이 빠진채 블레셋의 우상, 다곤 신상앞에서 우스개 거리가 될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마지막 부르짖음은 처절했습니다. 솔직하고 진솔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였습니다. 조금 더 일찍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배웠더라면 그의 인생은 초반부터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마귀가 자신의 생각을 장악하는지도, 정욕에 의해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삼손이었지만, 깊은 기도를 했더라면 훨씬 멋진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다섯번째, 삼손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마귀는 삼손을 무너 뜨릴 틈을 옅보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삼손이 잘 알았습니다. 한 두번 블레셋이 매복하면서 공격한것도 아니었고, 함정을 파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무시했습니다. 쉽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길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의 승리가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었으며,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블레셋이 치밀한 함정과 계략으로 다가오는 순간에도 삼손은 기도의 자리가 아니라 들릴라의 품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제가운데 전혀 계시지 않았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애를 쓰는 동안 그 눈은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배후에 마귀와 블레셋이 어떤 장난을 치는지도 몰랐습니다. 조금이라도 깨어 있었다면 보였을텐데...전혀 몰랐습니다. 우리의 모습일수 있습니다. 때로는 깊은 통찰과 분별이 있는것 같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눈이 얼마나 어두워져 있는지...우리 자신이 그럴수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삼손에게 위기 의식이 없었습니다. 영육간에 태평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해서 그럴수 있을것입니다. 결국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여섯번째, 삼손은 늘 혼자였습니다. 특별한 연단의 시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옆에 붙이지 않으실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곧 좋은 만남을 허락하셔서 교제속에서도 하나님을 누리게 하십니다. 만남의 축복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항상 혼자였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동역자도...없이 혼자만의 외톨이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부분도 있겠지만, 삼손의 경우는 많은 부분...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 보다는 이방 여인에게 더 관심 많았고, 사람들 속에서도 Peace Maker역할을 하기 보다는 Trouble Maker가 될때가 많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욕과 혈기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나실인인 동시에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반항아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삼손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위기의 상황에서건, 평안한 시간이건...삼손은 교제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대화의 수준도 수수께끼와 장난, 농담같은 것으로 마을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을을 상대하고는 했습니다 일상 생활을 무료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의 시간인 들릴라의 품에서도 수수께끼로 무료함을 풀곤했습니다. 진지함이 없었습니다. 심각한 인생의 철학이 없었습니다. 혼자만의 틀에 갇혀 버렸습니다. 결국은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는 자신만의 테두리 속에서 맴도는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외로움이 하나님으로 채워 지는것이 아니라 이방여인을 찾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혼자는 결코 신앙 생활을 할수 없습니다.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 교회, 목장 모임, Cell모임...공동체를 만들어 주시는 것도 그러한 이유인 것입니다.
일곱번째, 그럴지라도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누리고 싶은것... 즐기고 싶은것은 다 하고 살았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떠난것 같아 보였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삼손과 함께 하셨습니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삼손의 잘못으로 두눈이 뽑혔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삼손의 기도를 듣고 계셨습니다. 좀 더 일찍 하나님께 돌이켰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좋은 결말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블레셋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고, 삼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셨습니다. 마지막 시간에는 삼손이 일생동안 한 일 보다 더 많은 원수를 한순간에 갚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습니다. 그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일을 하신다고 그 도구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았다는것과는 다른 이야기일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바사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기도 하셨습니다.
삼손을 통해서 하나님은 큰 일을 하셨지만, 삼손의 삶을 통해서 슬퍼 하셨던 것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둘다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사는지도 무척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Doing과 Being에서 모두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부족하지 않은 인생...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함께 하셔야 할것입니다.
여덟번째, 돌이키면 하나님은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문은 돌이키려고 할때 언제든지 열릴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기다려 주십니다. 깨닫고 돌이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단,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 직전까지만 입니다. 가롯 유다는 마지막 시간까지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후회만 했을뿐입니다.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생명이 다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가장 원하셨던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 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멀리 할때가 많습니다. 눈앞에 손해 보는 일이 있을수 있거나,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보다 이 순간 만큼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빨리 돌이키면 돌이킬수록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 더 많은 기회가 있을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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