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Weekly칼럼(51-100)

능력이 있어야 정면돌파 할수 있다. (81)

Joseph Lee 목사 2013. 10. 31. 05:41

 

 

능력이 있어야 정면돌파 할수 있다. (81)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라 하고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을 올라가더라"(왕하 2:8-11)

<josephlee0212@gmail.com>

 

 

 

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무척 강력했다. 황홀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부에 와 닿는 듯한 느낌이었고, 기도를 하면 내 안에서 뜨거운 불이 올라 오는것 같아서 견딜수가 없었다. 찬양중에도 온 몸이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가 강했던것을 기억한다. 온 몸에 다가오는 감동...그럴때는 내 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하나님께로 끌려 가는것을 경험할수 있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주셨던 큰 은혜 중의 하나가 성령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그냥 책속에서...다른 사람들의 경험속에서 만나는 성령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뜨겁게 만져 주시는 성령 하나님과의 첫사랑이었기에 그 황홀감이 더 컸던것 같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간증이 꼭 있었고, 메세지가 있었다. 이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이야기 할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께서 입술을 주장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잘 하던 내가 아니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간증...말씀을 나눌때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강렬한 주님의 열정과 말씀이 불타고 있음을 계속 느낄수 있었다. 그랬기에 기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수 없었고, 주님을 전하지 않으면 내 영이 터질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때때로 거부할수 없는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리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신비한 체험으로 너무 깊이 빠지는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도할 때마다 신이 날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붙잡고 계셨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나이에 말씀의 깊이와 중심이 없었던 나였기에, 너무 체험 위주로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과 성령의 영감을 다양한 채널로 체험할수 있었지만...또 다른 문제가 내 안에서 일어 나고 있었다.

 

교만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교만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적인 우월주의였다. 불과 10대 중반의 나이에 하나님에 대한 말씀보다 성령에 대한 체험이 먼저 앞서다 보니 그런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왜 저렇게 기도하지 않을까? 왜 저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익숙해졌다. 난 그것이 교만인줄 조차 몰랐다. 주변에서 그런 체험을 하는 나를 세워주었기에...더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기질 또한 교만하고 남들 앞에 보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여러분을 통해서 앞날에 대해서 말씀 해주시기도 하셨다. 교만한 부분이 많은데도 여러가지 은사를 연속적으로 체험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적인 부분은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다. 지혜와 분별, 절제가 균형 맞추어 지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 부분들이 많은지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하셨다. 여러 사람을 통해서 받았던 예언 기도... 어떻게 보면 힘든 시절에 소망과 위로를 주시기도 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벅차고 내 생각을 뛰어넘는 미래의 시간에 대한 예언이었다. 붕떴다. 하나님앞에서 특별한 존재인것처럼 생각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경험을 혼자 하는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10대 후반이 넘어 가고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믿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나를 무척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고 있었다. 나 스스로 상당히 율법적이고,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는 그런 부분이 있었기에...뿌리 깊은 교만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착각과 교만...영적 우월 주의.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면서 황홀한 구원의 감격이 넘쳐서 기뻤지만, 하나님은 이런 부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주시지 않으셨다.

문제는 균형이었다. 성령과의 체험에 비해서 말씀이 너무 얕았다. 말씀을 깊이 파고 들면서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분별하기 보다는 기도 중에 성령께서 하시는 음성, 체험, 환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영적으로 답답하면 하나님과 멀어지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했나 고민하면서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었다. 찬양속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구나...혼자 심각했다.

감정적으로 하나님께서 만져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앞에 큰 범죄를 저지른 느낌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무엇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멀리 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감정의 기복이 컸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내 감정에 따라 신앙도, 하나님의 사랑도 왔다 갔다 하는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신앙이다. 말씀의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좋은 멘토를 만나게 하셨고, 좋은 선배들을 만나게 하셨다. 대학시절 만났던 선배들의 90%가 나중에는 목회자, 선교사가 되었다. 그 시절, 어린 나이의 선배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사랑과 은혜가 넘쳤던 사람들이었다. 이 시절부터 말씀 공부와 성경 암송이 시작되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생활속에서 발견하고, 또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앞에서 주장하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균형맞지 않은 체험주의 중심의 신앙에서 말씀 중심의 영성이 계발되기 시작했다. 멘토처럼 사랑했던 목사님도 일주일에 하루 9-10시간씩 말씀을 붙잡고 나를 가르치고 지도해 주셨다. 그 시간...말씀이 정말 꿀맛같았다. 말씀을 말씀대로 믿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얼마나 울고 울었는지...피부에 와 닿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서 역사하는 시간을 허락하셨다.

말씀을 들을때 마다 회개가 얼마나 흘러나오는지...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견딜수가 없었다.

이 시간은 내 자신의 부족한 인격, 성품...대인관계. 내적치유에서 말씀으로 나를 깊이 다루어 주시는 시간이었다. 지하철과 버스...걸어 다니면서 틈만 나면 말씀을 그대로 암송했다. 누구를 만나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전했다. 그 영혼들이 변화 되는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하는지 알수 있었다.

전도를 해도, 누군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하고 싶어도....생각과 마음에 새겨 두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흘러 나왔다. 마치 퍼즐 맞추듯이 줄줄 흘러 나왔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 하나님을 만났던 베드로의 첫번째 설교가 이랬겠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도, 난 내가 아니었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서 움직여서 불같이 흘러 나가게 하심을 볼수 있었다. 말씀이 능력이었다.

이 시간 배웠던 영성의 원리...그것은 말씀이 말씀대로 믿어지는것이었다.

 

어느날이었다. 목사님과 성경공부가 있는 날이었다. 여름 방학동안 40일동안 압축해서 하는 훈련이었다.

집에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가 고통속에서 기도원으로 올라가셨다. 아버지가 난리가 났다. 나보고 찾아서 모시고 오라고 야단이 났다. 그날밤에 잠을 잘수가 없었다. 전적으로 아버지 잘못이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일까요? 언제까지 저희 가정을 이렇게 힘들게 하시겠어요? 그 다음날, 성경공부가 있어서 가야 하는데 마음에 갈등이었다."목사님. 오늘 하루만 빠지겠습니다. 집안에 이런 일이 생겨서 어머니를 만나야 해요. 지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어 할까요? 목사님은 이해하시기 힘들겠지만, 저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이야기랍니다. 제가 어머니 마음을 좀 만져 드려야 해요. 그리고, 아버지가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도록 제가 막아야 합니다. 오늘 제가 성경 공부를 빠져야 할것 같으니..오늘 하루만 양해해주세요."

목사님께서 한참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그래...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조차 하나님께 맡기자. 기도할테니 그것 또한 내려 놓고, 하나님과 약속한 성경공부 하러 오너라." 너무 야속했다. 그렇게 설명하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떻게 이해를 못하실수 있을까.

"목사님...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용서해 주세요." "그런 일단 교회로 와서 결정하자."

이른 새벽에 목사님을 만나러 교회로 갔다. 마음이 심란했다. 고통스러웠다.

나를 만난 목사님이 성경책을 가져 오라고 하시고는 마 10:34-39을 읽으라고 하셨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이 믿어 지지 않으면 가위로 오리라고 하셨다. 속상했다. 해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믿는것이 아니라 상황이 이렇게 된건데 꼭 이렇게 까지 하셔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사님도 물러 서지 않으셨다. 한참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 이 모든 상황을 맡겨 드리기로 하고...내가 한발 물러 섰다. 어머니 일은 하나님께 맡겨 드리고, 아침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함께 한 형제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합심으로 함께 기도했다.

처음에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는것을 알수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쯤 어머니는 뭘하고 계실까?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마음의 고통을 생각하면 괴로왔다. 성경 공부를 마치고...집으로 왔는데 그 순간,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다 만져 주신것이었다. 어머니도 함께 회복시키셨던것이었다.

내겐 충격과도 같았다. 이런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구나.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데에는 결단과 순종이 필요하구나. 인내가 있어야 하는구나...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던 보배와 같은 영적인 원리였다. 내 나이 22살이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것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무수히 있었다. 먼저 내 안에서 말씀의 부흥을 경험했다. 읽고 또 읽을수록...말씀이 얼마나 꿀같은지...눈에서 뗄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그 정도의 단맛을 경험하기 힘든것이 아쉬울때가 많다. 성령께서는 말씀에 내 모습을 많이 비추어 주셨다. 계속 말씀으로 도전하셨다. 영과 혼이 찔러 쪼개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무엇인가가 아쉬움으로 다가 왔다.

첫사랑을 통하여 성령을 체험하고, 말씀의 깊이가 없다 보니 체험 위주의 신앙으로 갈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말씀 중심의 영성을 20대부터는 쌓기 시작했고, 내면은 정리정돈이 되어 가는것 같고,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아 지는것 같은데, 무엇인가 날개를 달고 비상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곤 했었다.

개인의 깊은 영성, 말씀을 통한 묵상, 말씀에 의해 깨어짐...사역을 위한 열정과 말씀의 manual. 나름대로 많은것을 배우기 시작했고, 쌓았지만...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나름의 의문이 많이 들었었다.

 

답은 성령 운동이었다. 말씀의 스펙트럼에 모든것을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맞추다 보니,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것 같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와 주도적인 사역에 대해서는 2000년전의 시간의 패러다임에 가둬 둘때가 많았다. 성령께서 사도행전에서 하셨던 일이 지금도 이루어 질수 있다는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성격적인 지식으로는 인정했지만, 내 믿음과 능력으로 받아 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지성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다보니, 기도 중심의 영성이 많이 약해졌던것이 사실이었다. 또 다른 불균형이었다.

결국 성령 운동은 기도 운동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기도 운동을 불일듯이 일어나게 하셨다. 회개부터 시작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많은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제한할때가 많았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저것은 이 시대에 성령께서 하시지 않는 일. 지식으로 성령을 제한 하는 부분에 대해서, 판단하는 부분에 대해서 성령께서 도전하고 계셨다. 이때 부터 문제는 말씀과의 균형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지나친 체험 위주로 갈수 있고, 다른 쪽으로 치우치면 성령을 제한하는 인본주의의 지성 신앙이 될수 있기에 참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동안 겪어 온 시행착오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도운동...성령 운동이 일어나면서 내 안에 가둬 두었던 자물쇠들이 벗겨 지는 느낌이었다. 사역의 문과 진로,장래의 문들이 활짝 열려져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성령님과 비상하면서 날아 다니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기도하면 할수록 입체적인 영성을 경험할수 있었다. 단순하게 기도만 했다. 단순하게 믿고 싶었다. 거절당하는 기도 제목 조차도, 의심이 들때도 단순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싶었다. 나는 기도 할뿐이었다. 응답은 온전하게 하나님 몫인것을 잘 알고 있다. 기도하면서, 성령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단순한 진리는 나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주님이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더 강력하게 기도를 통해서 경험할수 있었다. 성령님을 제한 하면 할수록 역사는 작아졌고, 반대로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폭발적인 은사와 능력도 경험할수 있었다.

때로는 무서울때도 있었다. 영적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탄의 영적인 공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잠잠했던 사탄이 이 시간부터는 역동적으로, 전면적으로 공격해 오곤 했었다. 성령 운동. 기도 운동이 내 안에서 일어날때는 성령에 대해서 더 민감해진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의 숨결과 임재에 대해서 더 민감해 지게 된다. 반면에 사탄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아주 교묘하고,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것이다. 분명해졌다. 사탄은 기도하는 사람을 무서워했다. 두려워했다. 기도없이는 사탄을 대적할수가 없었다. 기도만이 능력이었다. 기도를 통해서 다양한 영적 은사도, 능력도 체험할수 있다. 중요한것은 균형이다.

정확한 영분별력이다. 사탄도 함께 역사할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하나님께로 제대로 인도할수 있는지,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는것은 아닌지 주의해야 할 부분이 많은것이 사실이다. 또한, 성령께서 많은 음성과 환상을 보여 주시더라도 우리는 그 시간을 도저히 알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언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런지 제대로 알수 없다. 믿음으로 인내 하는것이 우리의 몫이다.

 

엘리야, 엘리사 시대의 북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은 참으로 암울했다. 아합왕과 이세벨,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람의 시대를 걸쳐서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섬기게 되고, 왕국 안 깊이 우상 세력이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너진것 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이었고, 그 어떠한 희망도, 방향도 없는것처럼 보이는 시대였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의 동일한 고백과 탄식이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일하고 계셨다. 시대가 암울하면 암울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크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선명하고 분명하게 일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을 다 이루고 계셨고,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어두운 시대에 중심이 된 사람은 이스라엘 왕도 아니었고, 이방 제사장, 선지자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역설하듯, 더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는듯 하지만, 성령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실때는 동화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났다. 분명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 시대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영광 받으셨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고난, 환란이 많은 시간이었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될때는 강력한 능력이 되어서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눈녹듯이 녹아버리고, 동화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엘리사때, 한 성읍의 물이 나빠서 토산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때, 소금으로 물근원을 고친 이야기...앞으로의 엘리사 사역에 대한 방향을 보여 주는 스토리다. 죽어가는 영혼들, 아파하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게 되는 말씀. 한 성읍뿐만 아니라 한 영혼에 이르기 까지. 과부의 아들이 종으로 팔리게 되는 상황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통을 가득채워서 그 빚을 갚게 하는 말씀. 귀족 여인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안겨준 이야기. 그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건져낸 이야기...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치료받은 이야기.

한 개인에서 성읍을 지나서 이스라엘 전체. 더 나아가서 적국인 아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만든 선지자 엘리사.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빚에 시달리는 사람부터 귀족과 왕과 왕족에게 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만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그를 만난 사람들은 위기 상황이 더 이상 위기가 아니라 한편의 지나가는 동화, 아름다운 스토리가 되어버렸다.

이스라엘의 풍전등화의 영적 상태가 이렇게 극적으로 반전될수 있을까? 한 사람이 이렇게 나라의 영적 분위기를 변화시킬수 있을까? 엄청난 위기를 기쁨으로 마무리하게 하는 그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역의 스펙트럼이 이렇게나 크고 넓을수 있을까? 도대체 이 한사람의 은사와 능력의 범위는 어디서 어디까지 일까? 지금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지금도 이런 역사를 어떻게 하면 볼수 있을까?

위기가 더 이상 위기가 안되게 하는 능력, 다른 영혼들을 평안의 능력으로 채워넣는 능력. 강팍한 사람들조차 마음을 열게 하는 능력...

 

엘리야와 엘리사의 능력은 끝없이 무궁무진했다. 능력의 근원인 하나님께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생명 걸기에 가능하다. 하나님께 미쳐있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음성외에는 아무 음성도 안 들리기에 하나님이 쓰실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순종하기에 하나님도 역사하셨다.

무엇보다 기도에 생명거는 성령의 사람이기에 이런 능력이 나타날수 있었다. 성령의 능력이 답이다.

 

위기는 피하게 되면 여전히 위기로 남아있다. 정면돌파해야 한다. 지혜가 필요하겠지만, 기도하게 될때 더 이상 위기가 아니게 될것이다. 기도의 능력이 뜨겁게 역사하게 될때, 하늘문이 열려서 그 위기가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될것이다. 이것은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서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일하신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도로 정면돌파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일하신다.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일것이다.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킨다. 기도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날에도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역사는 일어나고 있다. 총체적인 위기의 영적 분위기의 반전과 역적이 가능하다. 위기의 개인에서 한 도시, 국가를 움직일수 있는 능력은 기도에서 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신분과 환경을 가진 한 영혼도 기도로 변화 시킬수 있다. 기도는 능력이다. 기도는 모든 상황을 정면돌파하게 만든다.

능력이 있어야만 정면돌파 할수 있다. 죽으면 살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