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을 쏟아 내는 것이 기도다. (80)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시 109:1-1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올려 드려야 할 고백이다. 보통 때는 그러한 영적 원리를 잘 알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고난을 끝내는 가장 빠른 처방이라도 된듯, "하루라도 빨리 고난을 이겨내고, 고난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럴수록 주님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주변의 영혼들에게 많이 한다. 맞는 이야기지만, 힘들어 하는 영혼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려움이 올때는 각자에게 가장 민감하고 아픈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힘들어서 어쩔줄 모르는 영혼들에게 "이럴수록 더 감사해야 합니다." 라는 말씀을 전할때 맞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들의 마음이 더 강팍해지는것을 종종 볼수 있다. 그럴때는 조용히 말없이 그 영혼의 아픈 심정을 들어 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이 사역일수 있다. 그것이 이 시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일수 있다. 하나님도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실 시간이 있을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만져 주신 후에 말씀을 마음에 새겨 주실것이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감사해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해야 할 진정한 고백이자, 믿음의 가장 아름다운 태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정말 쉽지 않다. 어느 정도의 위기와 고난까지는 마음의 중심을 지킬수 있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될때는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는것이 사실이다. 그럴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강력하게 붙잡아 주신다. 이 시간의 고백은 우리가 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다. 성령께서 고백하도록 만드신다. 그 순간의 믿음은 내 안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것이다.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쓰러진다. 한 두번이 아니라. 때마다, 순간마다 쓰러진다. 일어나기 힘들때가 많다.
동터기 전이 가장 어둡다. 해가 뜨기 바로 직전이 가장 어둡다. 인생에서 어려움이 올때도 고난의 끝무렵이 가장 힘들다. 마귀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범위내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노력하다가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서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알기에, 마지막 시간에는 영적인 총 공격을 퍼붓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간에는 일반적인 연단의 고통을 능가한다. 더 거칠다. 숨이 막힐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인간적인 방법이 조금도 없는, 하늘만 쳐다봐야 하는 시간이다. 영적인 공격이 한 방향에서 오는 것이아니라 수 많은 방향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영적인 에너지가 다 고갈되어 버릴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가장 최선의 믿음의 고백과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하는 이 시간에 지금까지 어려움을 잘 참아 왔던 영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넘어 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입술로 원망하는 모습을 볼때가 많다. "지금까지 저렇게 힘든 고난을 귀한 믿음으로 잘 넘어 오다니..."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감동을 주는 사람들조차 쉽게 넘어가지 어려울 정도의 힘든 시간이 가장 마지막에 올수 있다. 죽음의 시간이다. 순간 순간이 숨막히는 시간이다.
잘 참다가 갑자기 불평, 불만이 쏟아 진다. 지금까지 참아 왔던 하나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들, 아픈 마음들, 하나님께 받아 온것 처럼
느껴지는 상처들, 서러움들... 봇물터지듯 흘러 나올수 있다.
이 순간,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것 처럼 느껴진다. 사랑하는 자녀가 고통속에 있는것을 즐기는 하나님처럼, 자녀가 조금이라도 평안하면 안되는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일수 있다.
때로는 하늘에다가 삿대질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수도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것 처럼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나에게 올수 있다.
치열한 연단의 시간중 마지막 고난이기에 겪을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시간에 마음을 쏟아 낸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아니라 마음속 밑바닥에 있는 영적인 쓰레기들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나 자신이 아닌것 같다. 다른 사람인것 같다. 어떻게 하나님께 그런 표현을 사용할수 있을까? 그렇게 사랑하고 흠모하는 하나님께 그런 말들을 함부로 뱉을수 있을까? 내 자신이 제 정신이 아닌것 같다.
막말을 토하는 기분이다. 그럴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밑바닥에 내려 가 본 사람이 거의 공통적으로 겪는 고백은 잘 참다가, 잘 견디다가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을때...그리고, 그 자신의 모습 때문에 너무 놀라서 주님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통곡하게 될때 고난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이 나는것을 보게 되었노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 정도의 마지막 순간의 극도의 고통이었기에 그렇다.
조금만 더 참을걸...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지 않을텐데. 입술로 원망하지 않았더라면...후회하게 되고, 얼굴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서 낯을 들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것을 볼수 있었기에 더 부끄러워 지게 된다.
진정한 영적인 밑바닥은 내 안에 믿음이 없는것을 보는것이다. 내 안에 조그마한 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깊이가 참으로 얕다는것을 보는것이다. 거기서 깨닫게 되는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의다.
어쩌면 고난의 가장 마지막 관문은 내 자신의 가장 처절한 부분, 자신도 모르는 밑바닥의 깊이를 보는것이다.
거기에는 거룩이 없다. 진실함과 고상함이 없다. 온갖 더러움과 영적인 쓰레기만이 뒤덤벅되어 있을뿐이다.
거기까지 가 본 사람은 간증을 해도 자신이 없다. 하나님만을 높인다. 자신의 자랑이 없다. 자랑할것이 없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존심도 쉽게 버릴수 있다. 진정한 겸손을 배울수 있는 시간이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나, 특별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못한, 별반 다를바 없는 나 자신이 되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높이시더라도, 자신의 밑바닥을 경험 해 본 사람은 잘 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세워 진 것임을, 자신에게 아무런 가능성이 없음을...
그래서, 다시 고백하게 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찬양해요가 아니라 비록 믿음이 없고, 쉽게 넘어 지는 나이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면...그것만을 믿습니다.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나의 믿음과 환경, 내 영적 수준, 깊이와 상관없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사실에 마음에 깊은 위안을 받는다. 도저히 쓰러져서 더 이상 나아갈수 없을때 난 할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것이기에, 안고 가실것이기에, 마음에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얼굴을 잠시 가리시는 경우가 있다. 잠시 떠나가시는것 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기도가 안된다. 두려움이 몰려 온다. 평안이 다 사라진다. 하루가 얼마나 긴지...그동안 자신의 힘으로 산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심을 확실히 알게 된다. 은혜를 은혜로 잘 알지 못할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 영이 답답해서 견딜수 없다. 고통스러워서 참을수가 없다.
훈련받는다고, 연단을 깊이 받는다고 내 죄된 본성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을것 같다. 여전히 나의 죄된 본성이 뿌리채 남아 있기에 엄청난 영적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뤄야 할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모습때문에 통곡해야 할 시간이 많을것이다. 알면서도 넘어지기도 할것이고, 부족한 모습때문에 수두룩하게 쓰러지기도 할것이다.
그러나, 연단을 받으면서 머리로 알고 있었던 사실...내 자신에게 1%의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이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 질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할수 있는 부분보다 할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하나 제어하고 자제하기가 힘들때가 너무 많다.
그런데, 그러한 내면의 밑바닥을 깨닫게 될때 깊은 좌절보다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된다. 기쁨이 몰려 오게 된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통곡하게 되지만, 곧 깨닫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이미 다 받으셨음을, 다 아시고 세워 주심을, 이러한 더럽고 추악한 모습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가능성 없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쪽으로 시선이 옮겨 가게 된다. 그게 겸손인것 같다. 그 순간 온유해 지는것 같다. 그때 기도 할수 있는것 같다.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왕, 다윗은 정말 험난한 시간을 보냈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낮추고 또 낮추셨다. 쫓기고, 또 도망가고, 억울한 누명을 덮어 쓰고, 원통한 일에 처하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오랫동안 놓이게 되었다.
자신이 선행으로 섬기고자 했던 사람들조차 악으로 다윗에게 돌려 주던 시간이었다.
마음에서 오는 고통과 근심으로 온 몸과 뼈가 녹는듯 했다. 낮과 밤시간 동안 고작 하는 일이 사울왕을 피해서 숨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시간 동안 다윗이 할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지경을 그 정도밖에 허락하지 않아서 다윗은 다른 선택을 할수 있는 길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신원하셔서 높이실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었다.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골리앗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돌로 죽였던 다윗.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영적인 가장 밑바닥, 자신이 결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은 그런 모습을 철저하게 깨뜨리는 환경을 연속적으로 다윗에게 허락하셨다. 비참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위대한 왕이 될수 있는 조그마한 가능성조차 없는 그런 사람임을 그 자신에게 계속 보여 주고 계셨다. 때로는 믿음의 용사처럼 보였던 다윗이었지만, 그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블레셋 왕 앞에 숨어 들어가서 침까지 흘리면서 미친척하며 연기해야 했던 다윗. 어쩌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 모습이 바로 너의 내면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라고 외치는것만 같았다.
마음이 억울함과 원통함에 녹아 내리고 있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애쓰고 기도했는데 자신이 얻는 것은 고작 생명을 연명하는 그 정도 수준의 하나님의 손길만 느낄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대적이었다.
인생에서 겪을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시간에서 할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음을 주님앞에 토해내는 것이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올려 드리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안에 조그마한 거룩도 없다. 진실함도 없다.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할수 있는 믿음과 마음의 여유조차 없게 된다. 자신이 생각할수 없는 밑바닥의 시간에 오게 되면, 기도조차 되지 않는다. 그냥 주님...주님...부를 뿐이다. 어떻게 기도 해야 할지 조차 모르게 된다. 기도를 해도 너무 막막하게 느껴 질뿐이다. 충격스럽고, 비참한 나머지, 그냥 마음으로 계속 통곡만 할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을 토해야 한다.
온 마음 속에 있는 원통함과 억울함, 고통...슬픔....외로움...모든 것을 주님 보좌앞에 쏟아 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슬픔과 상처. 거절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아픔과 거절감. 피해의식. 원통함...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원색적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우리 안에는 용서를 할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랑할수 있는 조그마한 능력도 없다.
사랑하고 용서할 사람을 골라서, 내 머리로 판단해서 하는 수준일 뿐이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 줄수 있는 사람을 용서할뿐이다. 그릇이 그것밖에 안된다. 거룩성과 진실함이 우리안에 조금도 없다.
그래서 마음을 토해 내야 한다. 비워야 한다.
누구를 저주 하고 싶을때, 미워 하고 싶을때, 용서가 되지 않을때...죽이고 싶을 만큼 힘들때...사람때문에. 환경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때 거룩한 기도조차 위선일수 있다.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앞에서는 솔직할수 있다. 시편 109편의 기도는 위대하다. 다윗에게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에 대해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원색적으로 올려 드리는 기도다. "그의 연수가 짧게 하소서.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게 하소서.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게 하소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도다. 이런 저속한 수준의 기도 내용이 어떻게 시편에 포함될수 있을까? 생각할수 있지만, 저속한 수준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 솔직하게 하나님께 원색적으로, 직설적으로 올려 드리는 기도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내면의 진실한 모습일수 있다.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어쩌면 이런 솔직한 기도를 받으시려고 다윗을 낮추시고 또, 낮추신지 모르겠다. 자신의 의가 부서지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고백하는 가장 처절한 몸부림. 자신안에 조그마한 진실함과 거룩성이 없다고 하나님만 찾으려고 애통해 하는 기도...그 순간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임재를 다윗을 경험했을것이다.
다윗의 그릇은 깨지고, 부서졌지만...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만들어 지고 있었다.
완전히 새롭고, 깨끗하고, 거룩한 그릇으로 만들어 지고 있었다.
연단의 시간에는 모른다. 훈련의 시간에는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 지고, 무엇을 위해서 준비 되어지는지 잘 모를수 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을때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알게 될것이다.
시109편의 기도는 원색적이다. 용서를 할수 없는 다윗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했다.
자신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응당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으로 세워지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어떤 왕보다 용서하고 포용하는 위대한 왕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렸다. 자신의 힘으로, 권력으로 누르고 짖밟을수 있는 사람들조차 다윗은 자신의 생각대로 피흘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할때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납짝 엎드렸다.
이런 모습은 결코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훈련이 필요할것이다. 그 훈련은 우리를 낮추고 또 낮출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시편 109편의 기도를 할수 있을것이다.
다른 영혼들을 저주 하는 기도같지만, 심판을 요구하는 기도같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 뜻대로 행동하고 움직일수 없다고 절규하는 다윗의 몸부림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자신은 이 수준 밖에 안된다고 하나님앞에서 비명지르는 기도다. 다윗은 이 순간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구하고 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치유하시고, 마음을 만지셨는지 그의 생애를 보면 잘 알수 있을것이다.
너그럽고, 마음이 넓고, 포용하고, 감싸 안고...다윗의 사람들에 대한 태도였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그러했기에 사람들에게 그런 태도와 모습을 보일수 있었다. 보통 그릇이 아니었다. 아니, 보통보다 부족한 그릇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다.
낮추고 낮추셨기에 가능했던 다윗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밑바닥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는 거룩이 아니었다. 몸부림과 절규였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다윗을 만지셨고, 새로운 그릇을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수 있었다.
하나님의 꿈이 있는 사람은 낮추시는 시간이 먼저 온다. 밑바닥이 드러나는 시간이 먼저 오게 될것이다.
그 순간 시편109편을 함께 노래하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오게 될것이다. 또한, 다윗의 후반 생애처럼 인생의 2막이 시작될것이다.
'2010 Weekly칼럼(51-1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 (82) (0) | 2013.10.31 |
---|---|
능력이 있어야 정면돌파 할수 있다. (81) (0) | 2013.10.31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79) (0) | 2013.10.31 |
위기는 영육간의 축복의 지름길이다. (78) (0) | 2013.10.31 |
나는 무엇 때문에 애통하는가? (77) (0) | 2013.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