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Weekly칼럼(51-100)

위기는 영육간의 축복의 지름길이다. (78)

Joseph Lee 목사 2013. 10. 31. 05:30

위기는 영육간의 축복의 지름길이다. (78)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으러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대하 20:15-17)

<josephlee0212@gmail.com>

 

 

 

안 좋은 일이 올때는 한꺼번에 온다.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괴롭게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이럴때는 하는 일들이 더 많이 꼬이기도 한다. 선한 의도로 했는데 상대방이 오해한다. 오해를 풀려고 설명하고 변명할수록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집에 들어와도, 나가도 주변에 그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것 같다. 하는 일도 사방에 어떠한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무너질때가 있다. 도움을 얻고자 아무리 뛰어다녀도 소용이 없는것 같다.

비지니스가 잘되다가 어느 순간 전혀 뜻밖의 문제로 소송이 들어 오기도 하고, 직원 중 하나가 별것 아닌것 같은데 문제를 크게 만들어 버려서 수습이 힘들어지기도 한다. 거래관계로 믿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변절을 해 버린다. 급하게 수습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데 건강까지 안 따르고,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움직이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한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것이 없다. 집에 들어와서도 일이 안되고 마음과 몸이 힘드니 가족끼리도 분위기가 어두워진다. 환한 빛이 집안으로 들어 오는것 같지만, 석양에 지는 해를 보는 듯하다. 마음에는 큰 커텐이 드리워져서 뭘해도 눈에 들어오지도, 먹어도 입맛이 없다. 잠을 깊이 자지도 못한다. 뼈가 녹는듯 하다. "이런 어려움과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 오는거야. 다시 일어서면 되지..." 그러지만 정말 쉽지 않다. 마음까지 약해진다. 다리도 후들 떨린다. 죽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아이들까지 아프고 애를 먹이기도 한다. 아내도, 남편도 이 순간만큼은 너무 멀게 느껴진다. 교회로 달려간다. 아무도 없다. 기도하고 기도하지만...기도의 안테나가 부러진 느낌이다. 먹통인것 같다. 아무런 기도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십자가를 바라본다. 주여...주여...몇마디...입술에서 흘러나오는것이 전부다. 교회에 온 가족이 손을 잡고 들어 오는 모습이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같다.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운전하는 사람, 음식을 먹으면서 웃는 사람...쇼핑하면서 즐거워 하는 사람...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같은 느낌이 든다. 난...왜 이럴까? 이런 어려움이 어디서 시작 되었지?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현재...주변에서 많은 영혼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한 두가지 문제가 아무리 총체적 난국이라고 할만큼 크고 어려운 문제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몸이 아파서 수술을 받으려니 돈이 없기도 하고, 수술조차 힘들다고 한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다. 이럴수가...하나님이 어떻게 내게 이런 시련을...  혼자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가까운 사람조차 멀게 느껴진다. 몸이 아프다...아이들 생각이 간절하다. 죽을수도 없다. 쉽게 낫지 않는 병이란다. 쉽게 치료되지 않는단다. 기도하지만, 기도조차 막힌다. 나는 홀 몸이 아닌데...아이는 아직도 어린데. 하나님...아이들을 생각해 주세요. 이번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살려주시면 주님 원하시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기도가 잘 나오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또 다짐한다. 불안하다. 집에 혼자 못 앉아 있겠다. 남편이라도 하나님께 함께 매달리면 마음에 큰 위로가 되겠는데... 인간적인 방법으로 움직이려는 남편의 모습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남편의 말이 때로는 내 심장을 찌르는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아시죠? 저의 어린 시절 기억하시죠? 어릴때 하나님을 모르던 그 시절. 전 철저하게 혼자였어요. 혼자인것이 익숙했어요. 저의 현재의 밝은 모습만 사람들은 보죠...하지만, 주님은 아세요. 저의 깊은 슬픔을요. 전 혼자였어요. 때로는 마음이 상해서 이불 덮고 밤새 울다가 잠들때가 많았던 아이였어요. 그리고, 어른이 될때까지 악착같이 살았어요.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다시는 처절한 아픔을 안고 살고 싶지 않았기에...이젠 조금 행복해 진것 같은데. 이젠 아픔을 조금 잊어 버린것 같은데...끝까지 저를 쫓아다니는 아픔이 있어요. 하나님. 무서워요. 너무 외로와요. 저 안 버리실거죠?  저 이대로 데려 가실것 아니죠? 아직은 아니예요. 저의 힘든 시간을 제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다시 되풀이 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주님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했을때 그래도 이 정도의 남자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리기도 했지만, 난 밀어 부쳤다. 솔직히 조건을 어느 정도 보았다. 마음과 몸 고생하지 않고 이 정도면 평생 의지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신혼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완전히 다 깨어졌다. 연애할때도 설마 설마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감정이 살아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결혼했다. 신혼 여행을 다녀 온후 시작된 손버릇...권위적인 태도. 독선. 독단. 자신의 마음대로 뭐든지 해야 하는 태도. 조금도 배려가 없는 모습. 악몽이었다. 처음에는 잠시 기분이 안 좋아서 저렇지 그랬지만, 아니었다. 그것이 남편의 모습이었다. 울고 또 운다...그래. 내가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나 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 대로 했더니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나 보다. 난 그래도 되지. 하나님을 무시했으니...이젠 쉽게 헤어질수도 없다.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몇번씩 언성이 높아지고 큰 싸움이 날때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지만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얼굴을 보여 주신다.

방에서 자는 아이를 꼭 안는다. 통곡할때 눈물이 아이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지만, 내 품에서 고이 자고 있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이 세상의 전부다. 방에서 울고 있으면 휴지를 가져다가 내 눈물을 닦아 준다. 내가 울면서 통곡할때면 다가와서 안아 준다. 이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어느날 남편이 큰 소리를 지르려고 하면 아빠의 다리를 잡고 울어 버린다. 상을 뒤엎을때는 넘 놀라서 울지만 이 어린 아이가 나를 보호하려고 나를 부둥켜 안는다. 내 눈에 피눈물이 흐른다. 언제까지 일까? 하나님...제가 잘못했어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볼수 있을까요? 제 마음은 시커멓게 타다 남은 재만 남았어요. 더 이상 심장 소리가 들리지가 않아요. 온 마음이 다 타버렸어요. 오늘이라도 하나님께 가고 싶어요.

 

어릴적 상처가 올라 온다. 이젠 몇 십년 전의 일인것 같은데 현실속에서 아직도 강력하게 살아서 움직인다. 때때로 그 상처가 분노로 바뀌게 되면 내 안에 사는 또 다른 내가 살아 숨쉰다. 무섭다. 살기 등등하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내 어린 시절...다들 평안하게 살때 난 처절한 고난과 아픔을 겪고 있었는데. 그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는데...이제는 절대로 무시 당하지 않을거야. 어릴때와 같은 일을 절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아.

평상시에는 괜찮다. 갑자기 자극을 받거나 무시당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때는 폭발해 버린다. 감정의 업앤 다운이 심해진다. 말이 많아 질때는 한없이 많아지다가 슬퍼 질때는 이 세상이 끝나는것 처럼 깊은 슬픔에 빠져버린다. 분노에 이글거린다. 못참겠다. 누군가에게 화풀이 했으면 좋겠는데...이 분노를 쏟았으면 좋겠는데.

어릴때부터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고난속에 나를 집어 넣으신거지? 하나님은 그 시간에 도대체 뭐하신거야?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나를 그렇게까지 꼭 힘들게 했어야 했어? 전부 거짓말이잖아.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죽이려고만 하셨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 챙겨 주신게 없는것 같아. 하나님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이야. 내가 고통 받는걸 즐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잖아...

그러고도, 하나님을 버릴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나님 사랑해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의 스토리다. 나의 상처이기도 하다. 우리 각자가 부분적으로 겪고 있는 아픔의 모습이기도 하다. 바로 옆사람의 실제적인 기도 제목이다.

웃고 있지만, 결코 웃지 못한다. 내면에 깊은 슬픔이 있다. 각 가정이 그렇다. 아픔이 없는 가정이 없다. 특별한 시간에 받는 연단이 있겠지만, 크던 작던 각자에게 주어진 아픔과 각자의 고난의 분량이 있다.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가 어떤 방법을 쓰느냐가 중요하다. 상처의 부작용은 피해의식과 열등감이다.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을 왜곡시켜 버린다. 늘 삐딱하게 바라보게 한다. 사람들을 믿을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할수 없다. 사랑을 못받았으니 사랑 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같은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늘 의심이 많고 불안하다. 자신을 달달 뽁아야 한다. 자학적인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듯한 느낌이다. 평안이 오히려 이상해진다. 항상 긴장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때조차 긴장관계를 조성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풀수 있는 능력이 약하다. 보는 관점이 누가 이기고 지냐에 초점이 가 있기에 양보하면 죽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모든것이 상처에서 비롯되었으며, 지금도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영혼의 위기다. 영혼의 깊은 위기에다가 육적으로 여러가지 위기가 오면 더 힘들다. 더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신다. 그 안에 애통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는 영혼들을 더 안아 주신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 받는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섬세하게, 깊은 사랑을 보여 주신다.

 

상처에다가 확대 재생산되는 고난과 아픔, 현실적인 위기감. 현재 다가오는 아픔... 총체적인 난국.

 

유다왕 여호사밧때 그랬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부귀와 영화를 허락하셨고, 하나님앞에 자신의 마음을 드리면서 온 백성의 마음이 여호와께 향하도록 최선을 다 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힘쓰기도 했다. 바알을 따르지 않고 유다에 있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기도 했다. 온 나라에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선포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왕이었지만, 인간적인 수단도 많았던 왕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혼인 동맹을 맺어서 자신의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도 한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선지자 예후로 부터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책망 받기도 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모습은 하나님께 온 마음이 다 가 있는것 같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다듬어 지지 않은, 오히려 세상사람보다 못할때도 많다. 연약하다. 때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때도 많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생명을 드리다 시피 찬양과 예배도, 섬김도 드리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도 모르게 타협하면서 옳고 그름을 구분조차 하지 못할때가 많이 있다. 여호사밧이 그랬다. 그는 완전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나라의 힘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을 의지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했다. 실수라기 보다 고의적인 범죄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호사밧을 사랑하셨다. 그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다시 드리려고 개혁을 단행했다. 하나님 중심으로 재판관을 다시 세우고, 산지부터 민간에 두루다니며 직접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한 여호사밧에게 위기가 찾아 온다. 총체적인 난국이다. 하나의 적이 아니라 모압, 암몬, 마온 사람들이 협공을 해서 여호사밧을 쳐들어 온것이다. 한 나라와 하는 전쟁이면 칼과 창이라도 들고 가겠지만, 여호사밧은 자신의 힘과 능력 밖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북이스라엘 아합과 혼인 동맹으로 얻게된 군사 동맹조차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자신이 의지했던 부분을 철저하게 깨뜨리시고 계심을 여호사밧은 깨닫게 되었다. 어려움의 고통. 두려움과 무서움... 그때서야 여호사밧의 마음 중심에 있는 믿음의 능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호와께 낯을 향하며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한다. 칼과 창으로 하는 전쟁을 준비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의 범위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여호사밧은 더 이상의 전쟁이 무의미함을 알고 엎드린다. 믿음의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반응한다. 몸에 그 믿음의 방법이 베어 있기 때문이다. 극도의 상황에서의 기도의 능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은 지혜로왔다. 혼자가 아니라 온 백성으로 함께 금식하며 여호와를 찾게 만들었다. 유다 모든 성읍에서 백성들이 몰려 왔다. 여호사밧은 그들과 함께 여호와께 기도했다. ...이 땅을 아브라함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리라...여호사밧은 아브라함과 솔로몬에게 하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백성과 함께 부르짖었다.

어떤 은사보다도, 어떤 능력보다도 한마음으로 올려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강력하게 움직이게 한다. 순전한 마음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이기에 그렇다. 한 마음으로 올려드리는 기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며 무기이다. 그 어떠한 상처와 총체적인 위기가 온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기도가 배후에 있다면 괜찮다. 자신이 이러한 기도를 올려드린다고 하면 이미 하나님의 날개 그늘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가장 안전한 지대에 있는것이다. 하나님의 피할 바위에 숨져진것이다.

과거가 어떻든, 어떤 아픔이든...상처든...하나님은 만져 주실것이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내 인생이 이렇지, 내 운명은 결국 이런거야" 이런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 어떤 질병도, 좌절도, 상처도, 정신적인 공격도 하나님은 치유하시고 회복하신다. 상황이 어떻든, 문제가 어떻게 꼬여 있든, 사람들과 관계가 어떻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버리는것이 중요하다. 내 자아, 내 모습...하나님께서 위기를 주실때는 내 모습을 보라는 Sign일때가 많다. 납짝 엎드려야 한다. 사는 길이다. 생명을 보전하며, 그 어떠한 총체적인 난국이라고 할지라도 벗어나는길이다. 뒤에 성령께서 버티고 계신다.

여호사밧이 유다백성과 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 드렸을때, 하나님의 응답이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호사밧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책임지도록 하게 하는것이다.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도록 하는것이 여호사밧의 기도였다.

여호사밧은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에 믿음과 찬양으로 반응했다.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옷을 입혀서 군대 앞에서 행진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게 했다.

그러한 여호사밧과 백성들의 태도와 모습에 하나님도 반응하셨다. 하나님과 백성간에 서로 사랑의 고백이었다.

찬양하고 노래하기 시작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총체적인 위기와 난국이 눈녹듯이 녹아지는 시간이었다. 기적과 이적의 시간이었다. 하늘문에 활짝 열리며 천군 천사로 둘러 싸는 시간이었다. 온 땅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어두움이 무너졌다. 자기들 스스로 무너졌다. 암몬과 모압, 그리고 세일산 민족 사람들끼리 분란이 일어나서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여호사밧을 공격하러 왔던 이들 세 민족들로 자기들끼리 칼을 겨누게 해서 다 전멸시켜 버리셨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기도가운에 악한 영은 어느 순간 허무하게 무너진다.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는 사자처럼 표효하던 그 모습이 여호와의 빛에 의해서 순식간에 무너진다. 다 사라졌다. 원수들이 다 죽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만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은밀한 곳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영육간의 축복도 함께 받게 된다.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적국의 물건중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엄청나게 많았고, 그 물건이 너무 많아 가져 가는데 사흘이 걸렸다.

여호사밧은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에 또 다시 즐거워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했다. 비파와 수금, 나팔로 여호와의 전에 나가기를 더욱 힘썼다. 여호사밧의 강점이다. 나라의 구원에 만족하지 않고, 일이 응답되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찾았다. 가장 큰 축복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것임을 여호사밧은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이 어떻든, 지나 온 시간에 어떠한 아픔이 있었던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다면 축복의 수단으로 사용된것이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처절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기도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를 오히려 축복의 수단과 통로로 바꾸어 버리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기다리신다. 때로는 침묵하실때가 있다. 더 크게 응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기다리심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