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명의 눈물의 선지자~이사야(144)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케 하였더라"(대하 28:23)
히스기야의 기적에는 이사야 선지자의 오랜 눈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크게 이루어 질때가 있습니다. 기적과 이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때는 시간이 필요없을 정도로 순간이지만, 그 시간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께서 하실 일의 분량이 클 것입니다. 또, 그만큼 축복의 그릇으로 빚어지기에 짧지 않은 시간동안 기다리면서 다듬어 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의 배후에는 수많은 기도와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갈수 없는 길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외로이 믿음을 고백하는 시간을 수없이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까지 배후에서 많은 이들이 중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움직일수 있는 방법은 기도와 금식외에 없습니다.
자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할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자녀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때, 부모의 마음은 고통속에서 찢어 지게 될것입니다. 불안과 초조속에서 두렵기까지 할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그럴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힘들게 할때는 그 고통의 강도가 더 클 것입니다. 기도가운데 눈물의 양이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지만...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하실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사야도 이러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냈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와 히스기야때 사역했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웃시야가 죽던해에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를 보내소서"라고 헌신했던 사역자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면 예레미야를 생각합니다. 바벨론의 침략에 맞서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지만, 바벨론에게 70년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해야 했던 남유다 말기의 선지자였습니다. 결국 남유다가 멸망하고 그 슬픔으로 예레미야 애가를 함께 노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 앞에 섰지만, 백성들에게 바벨론에게 나라가 멸망 된다고 선포하게 될때 매국노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었습니다. 그 또한,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늘 마음이 찢어지는 사역을 감당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이러한 눈물의 선지자는 예레미야만이 아닙니다. 그 전의 많은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바사 시대에도 많은 선지자들은 강팍한 주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사야 또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대하게 나아갔지만, 백성들과 왕으로 부터 거절당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겪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때 경험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사야의 기도로 국가의 영적 분위기가 180도 반전되고, 히스기야와 왕의 대신들과 백성들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눈물의 응답을 그의 시대에 분명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렸지만, 웃으면서 그 단을 거두는 기쁨을 보기도 했었던 이사야였습니다. 그의 기도가 있었기에 히스기야와 같은 인물이 만들어 질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한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지가 이사야의 눈물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으로 타락했던 영적 분위기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태도로 거듭나는 일이 남유다에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를 기도로 방어했던 이사야였습니다. 어떠한 위기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살아서 움직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도 결코 쉽지 않은 영적 암흑기의 시대를 울면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역대상.하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 왔을 때, 온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애썼던 왕입니다. 기도와 눈물로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하늘문을 여시는지에 대한 귀한 role model이 된 유다왕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조롱섞인 편지를 하나님의 성전에 올려 놓고 여호와를 마주 대하면서 처절하게 기도합니다. 막막한 느낌…모든 것이 다 무너 지는 느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으로 건지셨습니다. 하루 아침에 앗수르 왕의 군대 18만 5천을 무너뜨렸던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주실때도 많은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에도 히스기야에게 하셨던 그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놓였던 것도 슬펐겠지만, 자신의 대를 이을 후사가 없었다는 것에도 마음에 고통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가 울면서 마음을 찢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생명을 거두시려고 하셨던 계획을 하나님께서 돌이키셨습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쉽게 볼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을 히스기야는 여러 번 경험합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의 신실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진실한 리더가 깨어있을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적에는 이사야의 오랜 기도가 있었습니다. 배후에 하나님의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과 그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를 걸쳐서 사역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이 두 왕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극명하게 반대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권좌와 나라를 지키려고 했었습니다. 이사야는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에레미야만 눈물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지자가 그러했듯이, 이사야 또한 아하스왕과 온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간절하게 기도해야만 했었습니다. 아하스는 북이스라엘 위쪽에서 그 당시에 패권을 차지하던 앗수르에 납짝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앗수르에게 틈만 나면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를 친히 방문해서 앗수르의 아들 국가…종의 나라라는 것을 천명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거룩한 언약이 있는 국가라는 것을 철저하게 망각했습니다. 부끄러운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앗수르 국가의 신전을 모방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바꾸려고 하고, 앗수르의 우상을 그대로 전수받는데 앞장 섰습니다. 이사야의 눈물 어린 권면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 주고 싶으셔서 이사야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서 증표를 구하라고 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거절 당했습니다. 아하스는 이사야를 거절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이 순간에도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에 의해서 기록된 선지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적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공의,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을 생각해서 유다 나라를 건지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큰 사랑이 뒤범벅되어서 쓰여진 글입니다. 하나님의 짝사랑이자, 홀로의 고백입니다. 아하스왕이 다스린 16년의 시간 동안 이사야가 흘린 눈물은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경고 하실 때…그 메신저 역할을 한 사람도 이사야 입니다. 3년 동안 옷을 벗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떠한 수치가 이 나라에 임할지 미리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이 결실을 맺습니다. 아하스 왕의 자리를 이어 왕이된 히스기야의 마음 중심이 그의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배후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이사야 선지자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친 애굽 정책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어느 정도 외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할수 없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국가의 문제를 개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았기에 담대합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지금까지의 앗수르 중심의 모든 외교와 우상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스기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릅니다. 하나님의 절기와 율법을 회복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당장 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앗수르의 침공이었습니다. 이 시간에도 이사야는 물러 서지 않고 히스기야와 함께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나라를 압제로 부터 지킵니다. 온 백성들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첫번째, 함께 울어 줄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잘 될때 함께 기뻐해줄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성공할때 옆에 있으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진정으로 어려워 질때...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중보할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영혼을 돕는 것입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눈물의 기도의 사람이 옆에 있다면 이미 큰 영적인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선지자 이사야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만 따라 움직였어도 하나님의 큰 축복을 누릴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하스의 고집대로 움직였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사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않는 아하스도 대단한 고집과 강팍한 사람이지만, 이사야의 끈질긴 인내 역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수 있을때...하나님의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될것입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일 것입니다.
두번째, 영적인 분위기를 변화시켜야만 살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외교와 국방력 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수 많은 중보 기도를 쌓되, 왕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수많은 기도를 심었습니다. 아하스 왕때는 철저하게 거절 당했습니다. 오히려 앗수르에게 비굴하게 비위를 맞추면서 앗수르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앗수르의 우상을 유다 나라안으로 그대로 수입해서 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 오는 일었습니다. 아하스가 얻는 이득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습니다. 기막힌 일만 행하는 아하스를 통해서 이사야 또한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나라의 운명이 살아나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랜 기도가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에게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사모하며, 순종하려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 이사야를 닮으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일 자체보다 영적인 태도가 더 문제 일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영적 분위기를 반전 시킬때에만 완전한 회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러한 원리를 이사야를 통해서 철저하게 배우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결국 축복받을 만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축복을 받으려면 축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태도가 극명하게 대립됩니다. 아하스는 철저하게 앗수르를 추종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지키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을 의지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으로 종속되었습니다. 영적으로도 노예가 되기 시작합니다. 앗수르의 힘과 부귀를 부러워 하다 보니 이 모든 것들이 앗수르의 신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조상의 하나님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왕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신도 바꾸려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 옵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면서 여호와에 대한 예배와 유월절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앗수르가 침공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대면하려고 합니다. 끝까지 항복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흔들렸지만, 다시 여호와의 말씀에 마음 중심을 찾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관되게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또한, 실망시키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축복입니다. 그 태도가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열게 됩니다.
네번째, 선지자 이사야는 늘 자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왕으로 부터 철저하게 무시 당했습니다. 왕앞에서 아무런 쓸모없는 선지자 처럼 느껴졌습니다. 처절하게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때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왕이 수시로 찾아서 의지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 더 그랬습니다. 이사야도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적과 기적으로 하나님께서도 응답하셨습니다.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 그대로 응답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선지자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태도 또한 무척 귀합니다. 많은 이들은 조금 도와 주고 생색을 내려고 합니다.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것처럼 착각합니다. 보상받고 싶어합니다. 높아 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시 자신이 서야 할 자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합니다.
다섯번째, 하나님의 일에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입술에 지닌 이사야일지라도 하나님의 시간까지는 응답보다 거절이 많았습니다. 지치고, 낙심할수 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은 담대함으로 이사야를 붙잡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저항과 반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려면 이 길을 가서는 안됩니다. 처절하고 고독한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통 담대함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마귀의 저항과 세상의 반대가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오랜 거절감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통해서 국가의 영적 분위기를 반전 시켜 주시는 것을 이사야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 시간까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던 담대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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